산티아고 순례길(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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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DAY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끝)
2019.4.25.(목), 흐리고 비.구시가지에 위치한 호스텔 이 층의 방은 아담하고 깔끔했다. 흐리고 비가 오니 아랫목이 절로 그리웠다. 찌뿌둥한 몸을 침대에 눕혔다. 살갗에 닿는 깨끗한 백설 같은 이부자리가 포근했다. 카미노를 빨리 마쳐 생긴 자투리 시간이라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커튼을 젖혀 거리를 무심히 내려다봤다. 길바닥의 포석들이 비에 젖어 반짝거렸다. 한산한 거리는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만 눈에 띄었다. 빗물 따라 무료한 시간이 흘러갔다.손명락과 함께 포르투행 버스표를 예매하려고 터미널에 갔다. 어제보다 많이 붐볐다. 손명락은 삼 년 전 여행한 경험으로 이번 여정을 앞장서서 주도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유럽에는 ALSA 버스를 더 쳐주는 것 같아 10:00 표를 끊으려 했으나 매진..
2025.01.29 -
35 DAY | 피스테라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2019.4.24.(수), 흐리고 비.피스떼라를 떠나는 아침이다. 생장피드포르에서 받았던(3.20.) 가리비와 이곳 알베르게에 입실할 때(4.22.) 주인장에게 선물 받은 가리비가 깨지지 않게 티셔츠로 돌돌 말아 배낭에 넣었다.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던 가리비를 이제 배낭에 넣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며 내 자신에게 스스로 훈장을 부여했다. 카미노를 무사히 걸을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준 등산용 스틱은 알베르게에 남겨 놓았다. 남은 여정에 불편할 수도 있고, 옛 순례자처럼 순례의 종결과 정화의 의미로 무엇이라도 하나는 피스떼라에 남겨두고 싶었다. 오늘부터는 순례자가 아닌 방랑자가 돼 좀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작정이다.알베르게를 나왔다. 버스정류장이 가까웠다. 아무도 없어 일등으로 줄을 섰다(09:05). 조금..
2025.01.29 -
34 DAY | 피스떼라
2019.4.23.(화), 비 온 후 맑음, 또 비.간밤에 쏟아지던 비가 약해졌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느지막이 산책을 나왔다. 비구름이 가시지 않은 하늘은 운치를 자아냈다. 바다가 깨끗하고 파랬다. 대서양 바닷물에 손을 담갔다. 냉한 물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찰락찰락 간지럽혔다. 금방이라도 파란색이 손에 물들 것 같았다. 바닷가를 한 바퀴 돌았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아름다운 풍경 외에도 볼거리가 많았다. 피스떼라 해안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 닻과 ‘갈리시아 사람들은 전 세계에 퍼져있다’라는 구호가 새겨진 해양 기념탑, 나이가 얼마인지 궁금해지는 오래된 구식 등대도 색달랐다. 배꼽시계가 울렸다. 점심때가 벌써 지났다. 바다가 보이는 맛집 레스토랑 TEARRON에서 해물 요리로 식사..
2025.01.28 -
33 DAY | 라 페나 > 올베이로아 >(택시)무시아 >피스떼라
2019.4.22.(월), 맑은 후 비.25.7km(57.7km) / 5시간 22분라 페나 알베르게의 후문은 숲길로 통했고 정문에는 도로가 나 있었다. 두 길의 느낌이 많이 달랐다. 숙소에서 파는 샌드위치로 아침 요기를 간단히 하고 도로로 나왔다. 달을 보면서 걷는데 동쪽 하늘에서는 아침 해가 찬란한 빛을 뿜으며 올라왔다. 멀리 전원마을이 보였다. 엷게 깔린 안개가 우리네 농촌의 아침밥 짓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얀 쌀밥에 갓 담은 생김치를 올려 크게 한입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군침이 돌았다. 곧 이루어지리라 스스로 위로했다.바퀴 세 개 달린 수레에 배낭을 얹어 걷는 외국인 여성을 만났다. 오르막길이라 도와주려니 괜찮다며 홀로 용을 썼다. 여성이라도 짙게 패인 주름과 부리부리한 눈이 강인..
2025.01.27 -
32 DAY | 피스떼라로 향해 > 라 페나
2019.4.21.(일), 맑음.32km(32km) / 8시간 24분처음 계획은 산티아고 도착을 4월 24일로 잡았다. 몸 상태가 괜찮아 예정보다 며칠 앞당겨졌다. 어제(4. 20.) 도착했으니, 나흘이나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피스떼라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피스떼라 순례자 여권은 알베르게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아코디언 팸플릿에 스탬프를 받는 칸이 10개였다.중세의 순례 전통은 산티아고에서 ‘피스떼라’로 가서 옷이나 신발을 태워야 순례가 끝났다. 지금은 소각 행위가 금지됐지만, 그때는 그렇게 했다고 한다. 피스떼라는 스페인 서해안에 있는 작은 항구다. 산티아고에서 서쪽으로 약 90km 떨어져 지리적으로 땅끝에 있는 마을이었다. 가톨릭교회는 피스떼라가 카미노의 종점이 아니며 순례에 ..
2025.01.27 -
31 DAY | 오 빼드로우소 >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완주)
2019.4.20.(토), 맑음.20.8km(807.6km) / 5시간 9분달이 중천에 있을 때 오떼로 알베르게를 나섰다. 손명락이 혼잣말인 듯 지나가는 소리로 “아쉽다. 천천히 걷고 싶다.”라고 했다. 아쉬움과 환희의 교차점에서 카미노를 이미 완주해 본 사람의 말이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거리는 쥐 죽은 듯 고요하고 가로등 불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남은 거리 19.308km가 적힌 오빼드로우소의 마지막 표석을 확인하며 우리는 0km를 향해 깜깜한 숲길로 들어섰다. 혼자였다면 스산할 수 있었으나 길동무가 있어 걱정 없었다. 달빛을 받으며 푸근한 마음으로 밤길을 걸었다. 한 시간을 걸으니 산티아고 공항 울타리가 나타났다. 공항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안에 보이는 것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철골조 ..
2025.01.24 -
30 DAY | 아르수아 > 오 빼드로우소
2019.4.19.(금), 비 후 흐림.19.9km(786.8km) / 4시간 56분빗발이 땅을 적셨다. 배낭에 레인 커버를 씌우고 어김없이 대장정에 나섰다. 늦게 출발하겠다던 정재형과 김○주, 최인규가 알베르게 창문에 서서 하트를 날렸다. 먼 길을 나서는 격려였다. 조그만 일에도 마음을 써주는 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카미노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을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서로의 응원 속에 프랑스 생장피드포르를 기점으로 한 달째 걷고 있다. 멀고 멀게만 생각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드디어 눈앞으로 다가왔다. 내일이면 꿈에도 그리던 그곳에 발을 내디딘다. 계획을 맞추려고 오늘은 20km만 걷고, 쉬기로 했다. 10여 분 걸었다. 아스 바로사스 마을에 들어섰다. 오른..
2025.01.23 -
29 DAY | 빨라스 데 레이 > 아르수아
2019.4.18.(목), 맑음.30.3km(766.9km) / 7시간 32분알베르게 Castro 호스텔에서는 음식 파는 카페 영업을 하면서도 작은 주방을 만들어놓았다. 가난한 순례자를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대부분 그러하지 않았는데 고마웠다. 참치를 곁들인 라면을 끓였다. 젓가락이 없다고 하자 여종업원이 포크까지 갖다주는 친절에 감동을 받았다. 기분이 좋아져선지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동트기 전에 호스텔을 나왔다. 카미노는 호스텔 옆 순례자상 샘터에서 시작됐다. 검푸른 하늘에 뜬 둥근달이 어두운 길을 밝혀주려는지 아직 서산을 넘지 않고 머뭇거렸다. 마을 끝 집에 다릿발을 세워 올린 창고가 보였다. 쥐와 습기를 막으려고 세운 ‘오레오horreo’로 불리는 옥수수 저장고였다.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온 ..
2025.01.21 -
28 DAY | 뽀르또마린 > 빨라스 데 레이
2019.4.17.(수), 흐린 후 비.25.2km(736.6km) / 5시간 43분잠을 설친 탓인지 몸이 개운치 않았다.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고 종아리도 묵직했다. 이제 백 킬로미터도 채 남지 않았다. 힘내자며 자신에게 속다짐을 놓았다. 호스텔에서 조식을 마쳤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날씨 예보에 걸음을 빨리했다. 또레스 강(미뇨 강의 지류) 위의 다리를 건넜다. 여명이 밝아 왔다. 분위기가 그윽했다. 여기저기서 순례자들이 나타났다. 같은 시간대에 출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숲길로 접어들자, 카미노는 밀밭 사이의 오솔길로 변하더니 금방 다시 도로를 내놓았다. 세라믹 도자기 공장 끝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흙길로 접어들었다. 산불이 다녀갔나 보다. 쭉 뻗은 나무들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보기에 딱했다. 어디선..
2025.01.21 -
27 DAY | 사리아 > 뽀르또마린
2019.4.16.(화), 맑음.23km(711.4km) / 6시간 20분아침을 빵과 우유로 먹고 정각 여덟 시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어제는 비가 종일 내렸는데 오늘은 햇살이 눈부시다. 물기 밴 등산화도 신문지를 구겨 넣은 덕분인지 보송보송해졌다. 발걸음이 경쾌했다. 카미노 사인이 시작되는 골목 한가운데에서 뜻밖에 태극기를 보았다. 늘어나는 한국 순례자를 유치하려는 알베르게의 광고였다. 우리나라의 드높아진 위상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골목이 끝나는 언덕에 알파벳으로 ‘SARRIA' 대형 글자가 세워져 있고, 살바도르 성당Iglesia del Salvador 뒤로는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막달레나 수도원Convento de la Magdalena이 우람..
2025.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