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추억(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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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단지 경주에서
1.활성리에서 감산사지 삼층 석탑을 찾아가는 길에 원성왕릉(괘릉으로 불리기도 함)이 보였다. 그냥 지나치기에 섭섭해 차를 세웠다. 지난 8월 왔을 때는 잡초가 무성했는데 그동안 말끔히 정비했다. 한두 곳도 아닌데 경주시 관계자분들이 고생 많다. 원성왕릉은 사적으로 지정됐고 능묘의 화표석인 석주 2점과 무인상 2점, 문인상 2점, 돌사자 4점 등 10점은 일괄 보물로 지정됐다. 경주 원성왕릉(괘릉)이른 점심을 먹고 을 찾아갔다. 평일이어서 도로가 한산해 즐거운 마음을 더 했다. 왕릉에 도착하니 햇볕이 따가워 그늘에 들어가니 벗어나기 싫었다. 주변에 잡초가 길게 자랐다. 추석이 목전iloveeverydaynature.tistory.com2.황복사지에서 나원리 오층 석탑을 만나러 가다가 또 하나의 보물을 지..
00:57:47 -
경주 나원리 오층 석탑(국보)
* 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현지 안내판(요약)오층 석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에 5층의 몸돌을 올렸는데, 그 구성이 독특하다. 1층 몸돌은 4개의 돌을 짜맞추었고, 2층부터 5총까지의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과 2층 지붕돌은 아래쪽 처마받침돌과 위쪽 지붕돌을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 올렸고, 3층부터 5층까지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지붕돌의 경사면 모서리에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2~3개씩 남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이 있고, 머리장식의 중심을 세운 쇠기동인 찰주가 부러진 상태로 남아 있다. 1996년에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함께 금동구층탑 3기, 금동삼층탑 1기, 금동불상, 먹으로 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파편 등이 발견되..
2025.02.01 -
경주 황복사지 3층 석탑(국보)과 미완성 왕릉
*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국보* 현지 안내판(요약)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 석탑이다. 바닥돌의 각 면마다 2개씩 안기둥을 새기고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지붕돌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만 남아 있다. 기록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그 아들인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706년에 다시 부처님 사리와 순금 불상 등을 봉안하여 신문왕과 효소왕 두 왕의 명복, 왕실의 번영, 그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고 한다.1942년에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과 순금으로 만든 불상 2구, 유리구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사리함..
2025.01.31 -
경주 마동 삼층 석탑
* 慶州 馬洞 三層石塔*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석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에 3층의 몸돌을 올린 형태로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른 석탑이다. 바닥돌은 아래층이 4개, 위층이 8개의 돌로 짜여 있으며, 각 층마다 모서리 기둥과 2개의 안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몸돌과 지붕돌은 서로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으로 층이 나 있고, 네 귀퉁이의 아랫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석탑이 있는 이곳은 장수사 터로 전해진다. 불국사의 석탑을 수리할 때 장수사에서 돌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사냥을 좋아했던 김대성이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을 잡은 뒤 산 밑 마을에서 유숙하였다. 꿈에 죽은 곰이 나타나 자신을 위해 절을 세워달라고..
2025.01.30 -
경주 감산사지 삼층 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감산사지 삼층 석탑* 甘山寺址 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현지 안내판(요약)석탑은 감산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삼층 석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 다시 세웠다. 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형태인데, 2층과 3층의 몸돌은 없어지고 1층 몸돌 위에 지붕돌만 3층으로 쌓아 놓은 상태이다. 바닥돌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이 모두 있으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이 있고, 네 귀퉁이는 치켜 올라간 모양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그 일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봉..
2025.01.28 -
경주 활성리 석불입상
* 慶州 活城理 石佛立像*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현지 해설판(요약)석불은 연지암에 모셔져 있는 여래입상이다. 배 모양으로 다듬은 광배 앞면에 불상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이 있고, 귀가 매우 길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훼손되어 수리한 것이다. 몸은 균형이 잘 잡혀 당당해 보이며, 양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린 긴 옷자락이 몸 전체를 덮고 있다. 양손은 가슴 앞까지 들고 있으며 원손에는 약그릇으로 보이는 지물이 있다. 광배는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구분하여 도드라지게 새기고 바깥 부분에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김연지화'라는 보살이 발 가운데서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고 그곳에 직접 가서 땅을 파서 보니 이 석불이 나왔으므로 암자를 지어서 연지암이라고 하였다고 ..
2025.01.27 -
경주 숭복사지 삼층 석탑을 다녀와
* 崇福寺址 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현지 안내판(요약)석탑은 숭복사 터의 금당지 앞에 동서로 서 있는쌍탑이다. 두 탑은 동일한 규모와 형태로 2층의 바닥돌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올렸으나 동탑은 2층 몸돌과 머리 장식 부분이 없어졌고, 서탑은 1층과 2층의 지붕돌만 남았다. 바닥돌의 위층 네 면에 2구씩 팔부신중상을 새겼고, 1층 몸돌에는 문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의 아래 받침은 4단이다.지금의 원성왕릉(사적) 자리에 있던 곡사를 이곳으로 옮겨와서 '대숭복사'라고 하였는데, 최치원이 절을 옮기게 된 배경과 과정을 '초월산 대숭복사비'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절터에 남아 있던 비석의 받침돌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비석은 2013년 금당지 남쪽에 복원되었다.* 답사 노트: 제38대 원성왕이..
2025.01.26 -
경주 원원사지 동, 서 삼층 석탑
* 慶州 遠願寺址 東, 西 三層石塔*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원원사는 신인종(神印宗, 밀교의 한 종파) 승려들과 김유신 등 당시 주요 인물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호국사찰이다. 동, 서 삼층석탑은 금당 터 앞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1년 경주 고적보존회가 복원했다. 두 탑 모두 2층 바닥돌 네 면에 십이지신상을, 1층 몸돌 네 면에 사천왕상을 새겼다. 석탑은 일반적 양식의 신라 석탑 가운데 부조상을 새긴 가장 이른 시기의 탑으로 알려져 있다.* 답사 노트: 사적으로 지정된 봉서산 원원사지는 통일신라 시대 절터다. 원원은 멀 遠(원)자에 원할 願(원)자이다. 멀리 있는 것을 원하는지, 윈하는 것이 멀리 있는 뜻인지 범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원원사는 신라 왕실과 김유신 등의 지원을 받아 창건해 신..
2025.01.25 -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을 다녀와
어제는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보물)을 다녀왔고, 오늘은 낭산 남쪽 봉우리에 있는 선덕여왕릉(사적)을 다녀왔다. 그리고 주변의 사천왕사지(사적)와 능지탑지(경북 기념물)를 둘러봤다. 인근의 신문왕릉도 갔으나 정비 공사 중으로 입장할 수 없었다. 모두 낭산에 있는 문화유산들이다.선덕여왕릉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바닥은 맨땅의 공터이고 간이 화장실이 설치돼 있었다. 바로 앞이 사천왕사 터였다. 사천왕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찰이다. 이십여 년 전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빈터는 미완의 조형물과 사찰 부재, 두 개의 받침돌과 당간지주만 휑했다. 호국불교로 명성을 떨쳤고,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의 신령스러움을 증명한 사찰이었다지만, 지금의 빈터는 널찍하기만 해 공허했다. 인적 없이 쓸쓸한 바람만..
2025.01.23 -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 慶州 狼山 磨崖菩薩三尊坐像*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과 신장으로 구성된 삼존상으로 조각한 바위의 표면이 거칠고 균열이 심해서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다.중앙의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이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미소를 띤 얼굴에 옷이 양쪽 어깨를 감싼 모습이 고려 불화에 보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흡사하다. 좌우에 거리를 두고 갑옷을 입은 신장이 보살상을 향해 앉아 있다. 왼쪽 신장은 오른손에 칼을 들었고, 오른쪽 신장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 이 삼존상은 조각 기법 등으로 볼 때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삼존상은 부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을 두는 일반적 형식과는 달리, 중앙에 보살이 있고 그 좌우에 무장한 신장이 있는 점이 독..
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