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DAY | 피스떼라

2025. 1. 28. 16:27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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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23.(화), 비 온 후 맑음, 또 비.

추모 닻
해양 기념탑
옛 등대


간밤에 쏟아지던 비가 약해졌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느지막이 산책을 나왔다. 비구름이 가시지 않은 하늘은 운치를 자아냈다. 바다가 깨끗하고 파랬다. 대서양 바닷물에 손을 담갔다. 냉한 물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찰락찰락 간지럽혔다. 금방이라도 파란색이 손에 물들 것 같았다. 바닷가를 한 바퀴 돌았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아름다운 풍경 외에도 볼거리가 많았다. 피스떼라 해안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 닻과 ‘갈리시아 사람들은 전 세계에 퍼져있다’라는 구호가 새겨진 해양 기념탑, 나이가 얼마인지 궁금해지는 오래된 구식 등대도 색달랐다.

한 냄비가 2인 분으로 양이 많았다.


배꼽시계가 울렸다. 점심때가 벌써 지났다. 바다가 보이는 맛집 레스토랑 TEARRON에서 해물 요리로 식사했다. 별미였다. 음식 맛만큼이나 가격도 만만치 않은 백십 유로가 나왔다. 공동 경비로 지출하려는데 김상기가 또 선뜻 거금을 내놨다. 맛집을 찾을 때마다 선수를 치는 친구가 고맙다 못해 미안할 지경이다.


부른 배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어제 못 본 석양을 보러 등대가 있는 0km 종착 표석으로 갔다. 그곳까지 3km는 은근히 오르막이었다.


검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와 맞닿은 벼랑에는 마치 융단을 펼쳐 놓은 듯 노란 꽃들이 일렁거렸다. 구름이 있어 걷기에 더없이 좋았다. 또 한 번 0km 표석에 섰다. 표석은 언덕 위에서 망망대해를 굽어보고 있다. 땅끝이라면 바다와 맞닿은 곳이어야 실감 날 텐데 싶었다. 그러나 이곳에 우뚝 서서 만경창파를 바라보는 것도 괜찮았다. 표석에 기대앉았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하늘을 우러러봤다. 카미노의 끝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다. 순례길은 거기서 이미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도 망망대해는 우리의 긴 여정을 또다시 깔끔하게 마무리 짓게 한다. 지금은 여기 머물러있지만 내일은 떠나야 한다. 어쩌면 0km의 표석은 ‘여기서부터 다시 출발’하라는 의미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중세의 순례자들이 옷을 태우고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씻은 것도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간절한 다짐이었을 것이다.


등대로 갔다. 길목에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븐 호킹(1942.1.8.~2018.3.14.) 박사가 2008년 9월에 방문했다는 기념 동판이 서 있었다. 동판에는 “나는 세상의 끝까지 여행을 즐겼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라는 문구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었다. 등대 부근에는 순례자가 남긴 낙서와 징표들, 옷가지를 몰래 불태운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파란 하늘과 파도가 부딪쳐 일어나는 흰 물거품, 벼랑의 노란 꽃들이 순례자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맑은 날인가 했더니 구름이 또 몰려들었다. 오늘도 석양을 보는 건 틀렸다. 걸음을 옮겼다. 마을 입구쯤에서 거센 소나기를 만났다. 숙소까지 뛰어오니 그쳤다. 내일이면 피스떼라를 떠나야 한다. 알베르게에서 바닷가로 가는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골목길로 바닷가 모래사장에 나가 한동안 서성거리다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어제 올베이로아에서 택시로 점프한 것은 결과적으로 베리 굿이었다.


피스떼라 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