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답사여행(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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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불좌상(국보)
* 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경주시청 문화관광 인터넷 자료(요약)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 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 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 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 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
2025.02.20 -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 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경주시청 문화관광 인터넷 자료(요약)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뚝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2025.02.19 -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과 다보탑(국보)
* 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국보* 경주시청 문화관광 인터넷 자료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 10년(774) 12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한 후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과 다보탑(국보)은 절의 대웅전 앞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 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
2025.02.18 -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의 주둔지로 이용돼 일본군에 의해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탔다. 그 후 대웅전 등 일부 전각을 다시 세웠고, 1969~1973년 대대적으로 복원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95년 석굴암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慶州 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국보* 현지 해설판(요약): 안양문 앞에 설치된 돌계단 다리다. 위쪽이 칠보교, 아래쪽이 연화교다. 두 계단은 아미타불이 거주하는 극락세계가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는 불경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이 있다면 이 두 다리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연화교에는 계단마다 넓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1919년에 전체적으로 보수하였고, 1972년에 동자주(童子柱, 돌난간 중..
2025.02.17 -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세 번의 일정으로 경주를 다녔다. 관광 지도를 들고 국보와 보물을 우선해 찾아갔다. 사적(史蹟)은 자연히 그곳에 있었다. 십이 일 남짓 쉰 곳 넘게 다녔으니 주마간산이다. 마지막 일정으로 학창 시절 수학여행지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불국사에 갔다. 신혼여행을 그곳에 다녀왔지만, 그때의 감동을 넘어서지 않았다. 이번 기행에는 현지 안내판을 읽으며 나름대로 감동하려고 애썼다. 불국사는 신라인의 깊은 신앙심과 풍부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정수다.* 慶州 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 국보* 현지 안내판(요약): 자하문 앞에 설치된 돌계단 다리다. 위쪽이 청운교, 아래쪽이 백운교인데 속계와 불국토를 연결하는 종교적 상징물의 성격을 지닌다. 청운교에 비해 아래쪽인 백운교의 높이와 너비가 조금씩 더 ..
2025.02.17 -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慶州 南山 彌勒谷 石造如來坐像*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은 보리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있다. 광배와 더불어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까지 갖추고 있어 경주 남산 석불 가운데 가장 온전하다. 머리가 작은 소라 모양으로 덮여 있고,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높게 솟아 있다. 얼굴은 다른 돌로 조각하여 끼운 것으로 보인다. 양어깨를 덮은 옷은 주름이 촘촘한 편이다. 손의 모양은 왼손은 손바닥을 배 부분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불상과 별도로 만들어 세운 광배는 꽃무늬, 불꽃무늬, 작은 화불(化佛, 변화해 나타나는 부처)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광배 뒷면에, 왼손에 약그릇을 든 약사불울 선으로 새긴 점이 독특한데 동방 약사, 서방 아미타라 하여 석조여래..
2025.02.13 -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주변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을 모아 1923년 다시 세운 불상과 보살상이다. 인근에서 禪房寺(선방사)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어 '선방사 삼존불'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지명을 따서 '배동 삼존불'이라 한다. 이 삼존입상은 미소를 머금은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 모습이 특징이다. 중앙에 자리한 불상은 이중으로 된 상투 모양 머리에 네모나고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몸은 목이 거의 없고 두 손은 큼직한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왼쪽의 보살상은 작은 부처가 새겨진 보관을 쓰고 왼손에 정병을 든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굵은 목걸이와 구슬 장식을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이 점 때문에 ..
2025.02.13 -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 慶州 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국보 * 현지 안내판(요약)신선사 마애불상군은 ㄷ자 모양으로 솟은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여러 불상을 지칭한다. 단석산 중턱의 암벽 위에 지붕을 덮어 석굴 법당을 만들고 벽면에 불상을 조성하였다. 암벽의 세 면에 불상, 보살상, 인물상 10구가 새겨져 있다. 동북쪽의 독립된 바위 면에 거대한 미륵입상이, 동쪽과 남쪽 바위 면에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삼존을 이루고 있다. 남쪽의 보살상 옆에 새겨진 명문에서 이 절의 이름이 신선사이고, 이곳에 미륵상 1구와 보살상 2구를 조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쪽 바위에는 불상 보살상, 인물상 7구가 얕게 새겨져 있다. 위아래 2줄로 배치되어 있는데 위쪽은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보살입상, 또 다른 여래입상,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
2025.02.12 -
경주 금척리 고분군
* 慶州 金尺里 古墳群* 사적 * 현지 안내판(요약)금척리 고분군은 50여 기의 크고 작은 봉분들로 이루어진 유적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금척(금으로 만든 자)을 하늘로부터 받았는데, 중국이 이를 탐해 사신을 보내자, 금척을 이곳에 묻어 숨긴 후 40여 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이 금척인 것은 이 전설에서 유래한다.고분군은 서쪽으로 갈수록 봉분의 크기가 큰데, 가장 서쪽에는 표주박 모양의 고분이 있어 눈길을 끈다. 1952년 경주와 대구 간 국도 공사를 할 때 반이 잘려 나간 고분 2기를 발굴하였다. 조사 결과 이 무덤들은 삼국 시대 때 신라에서 주로 사용한 돌무지덧널무덤임이 확인되었고, 금으로 만든 가는고리귀걸이,..
2025.02.09 -
경주 전 홍유후 설총의 묘
* 傳 弘儒侯 薛聰 墓* 경상북도 기념물* 현지 안내판(요약)이곳은 신라 신문왕 때 학자인 설총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홍유후는 그의 시호(諡號, 죽은 뒤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다. 설총은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이며, 신라 10현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이고 어머니는 태종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다. 출생 시기는 654년에서 660년 사이로 추정되고, 사망한 때는 알 수 없다. 신문왕 때 강수와 함께 국학박사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벼슬은 한림(翰林, 임금의 말과 명령을 글로 짓는 일)을 맡아 하던 벼슬에 이르렀다.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이두의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화왕계를 지었다. 무덤에는 둘레돌이 몇 군데 드러나 있으며, 무..
2025.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