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3. 00:16ㆍ산티아고 순례길
2019.4.19.(금), 비 후 흐림.
19.9km(786.8km) / 4시간 56분
빗발이 땅을 적셨다. 배낭에 레인 커버를 씌우고 어김없이 대장정에 나섰다. 늦게 출발하겠다던 정재형과 김○주, 최인규가 알베르게 창문에 서서 하트를 날렸다. 먼 길을 나서는 격려였다. 조그만 일에도 마음을 써주는 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카미노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을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서로의 응원 속에 프랑스 생장피드포르를 기점으로 한 달째 걷고 있다. 멀고 멀게만 생각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드디어 눈앞으로 다가왔다. 내일이면 꿈에도 그리던 그곳에 발을 내디딘다. 계획을 맞추려고 오늘은 20km만 걷고, 쉬기로 했다.
10여 분 걸었다. 아스 바로사스 마을에 들어섰다. 오른쪽 길섶에 죽은 순례자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 언저리에 피어난 하얀 들꽃이 마치 그들의 넋인 듯 바람에 일렁거렸다. 무슨 연유로 먼저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애처롭다. 순례 첫날, 론세스바예스에서의 순례자의 축복 미사가 문득 떠올랐다.
숲길을 따라 걸었다. 전원 풍경이 펼쳐졌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곤 했다. 오스 뻬네도스 마을 언덕에서 지팡이 파는 상인을 만났다. 마수걸이는 했을까? 물건을 진열해 놓아도 팔릴지 의문이 들었다. 산티아고가 멀지 않아 내짚던 지팡이도 접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카미노를 역으로 걷는 사람도 간혹 보였다. 옆에는 커피자판기 두 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덕에서 떠나온 아르수아 마을을 바라봤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탁 트인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아 뻬로하 마을에 진입했다. 한 가정집에서 순례자를 위한 스탬프를 마련해 놓았다. 안내문에 “부엔 카미노 33km, 비가 오면 스탬프를 공포 안에 넣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를 스페인어와 영어로 적어 놓았다. 또 다른 집에서는 긴 담벼락에 ‘지혜의 벽’이란 이름으로 철학과 종교에 대한 글을 모아 붙여놓았다. 아 뻬로하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이런 작은 정성이 수많은 사람을 카미노로 불러들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지 생각됐다.
목축 농장을 지나 ‘아 까에’ 마을에 도착했다. 맥주병으로 장식한 카페Tia Doroles가 보였다. 맥주병을 쌓거나 줄을 지어 이어 놓은 다양한 모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카페 옆 작은 기념품점에는 태극마크의 조가비가 보였다. 등산화, 운동화, 부츠, 장화 등 낡은 신발에도 꽃을 심어놓았다. 처음에는 색달라 보였지만, 이제 익숙해졌다. 순례길 주변에 가꿔 놓은 예쁜 정원이나 꽃나무가 더없이 반가울 때도 있었다. 사소한 공간을 정성스럽게 꾸며 지친 자에게 근사한 풍경을 선물하는 그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살세다 마을 바르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폰세바돈의 산길을 함께 내려온 독일 여성이었다. 그녀는 동행한 신사를 우리들에게 소개했다.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헤어지기 전, 그녀가 우리의 행운을 빌면서 네 잎 클로버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행운의 상징 네 잎 클로버는 김상기 품속에 모셔졌다.
산띠아Santia 마을을 지났다. 카미노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로 꽉 차있는 숲길로 이어졌다. 자연스레 삼림욕이 되었다. 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이 자리에서 순례자에게 푸른 기운을 나누어 주었으리라. 나무숲을 보려고 우리는 산에 가는데 이곳에서는 마을이 곧 숲이다. 우리나라도 당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킬 게 아니라, 무성한 나무 숲이 마을의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다.
N-547 도로를 가로지르며 스페인 자국민인 ‘미스터 카미노’ 일행을 만나 서로 격려하며 길을 재촉했다. 산따 이레네 마을에서는 자원봉사자가 순례자에게 스탬프를 찍어주고 있었다. 망설이다 지나쳤다. 순례자 여권의 칸을 헤아려 그 기간에 맞추려고 하루 두 군데에서 스탬프를 받아왔다. 어떤 자는 국내에서 1매, 현지에서 1매, 2매를 준비해 원하는 스탬프를 모두 받기도 했다. 간직하면 훗날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추억이 될 것이었다. 캠핑장 알베르게를 지났다. 황경엽이 산티아고 20.585km 표석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와, 20km 남았다. 기분이 너무 좋다.”라면서 털썩 주저앉아 움켜진 주먹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그것을 본 나도 19.970km 표석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셀카를 찍었다.
오빼드로우소 입구 삼거리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시청에서 가까운 사설 알베르게에 투숙한 후 바르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햇볕이 내리쬐었다. 빨래를 널었다. 한 사람씩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나도 움직였다. 마을이 조용했다. 시청 앞에 세워진 수탉 동상과 시의회가 국제 여성의 날에 세운 동상을 보았다. 맛집을 확인한 후 돌아왔다. 김상기가 와인 2병과 마른안주를 사 와 로비에서 즐겁게 마셨다.
저녁은 쇠고기 스테이크로 유명한 맛집에 가서 먹었다. 우성현, 정재형, 김○주, 최인규, 김효겸과 함께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었다. 2차로 점심때 갔던 그 바르에서 와인을 마셨다. 그동안 카미노에서 느낀 체험담이나 소회를 돌아가면서 말했다. 걷는 것보다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는 소감이 대부분 이었다. 우성현은 “나를 찾고 38년 된 친구(주○철)를 잃게 되었다.”라며 속내를 털어놨다. 주○철은 고향 친구로 카미노에 함께 왔다. 그러나 친구는 컨디션 난조로 뒤처지고 여기까지 혼자 왔다. 둘은 산티아고 입성을 앞두고 통화를 했다. 주○철이 우성현에게 서운함을 토로한 것 같았다. 우성현의 말을 이해는 했으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나의 소감 발표는 의례적 인사말로 가름하였다. 손명락은 3년 전 처음 카미노를 다녀왔다. 이번이 두 번째다. 그는 휴대전화에 메모한 기록을 낭독했다. “3년 만에 다시 까미노 길 위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시원스레 펼쳐진 푸른 밀밭과 파란 하늘이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다. 그리고 평화롭고 순박한 시골 마을의 풍경과 쭉 뻗어있는 순례길이 나를 부른다. 남들은 한 번도 오기 힘든 이 길을 나는 두 번이나 올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 자랑하고 싶다. 건강, 시간, 동료들, 가족들의 협조와 이해 그리고 감사와 고마움, 미안함뿐이다. 이 길을 걷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독일의 연예인 하페 케르켈링의 말처럼 첫째는 육체와의 싸움이고, 둘째는 정신과의 싸움이고, 셋째는 영혼과 싸움이다. 나는 싸움을 대화로 바꾸고 싶다. 비 오는 진창길이나 햇볕이 쬐는 푸른 들판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나 자신과 늘 대화를 한다. 힘들었던 시간, 즐거웠던 시간,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를 마음속으로 외친다. 이 길에서는 발로 걷는 것보다는 정신과 마음으로 걷고 싶다. 언제나 열린 이 길에서 나는 감사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느낌과 생각이 공감돼 많은 박수를 받았다. 밤늦게 숙소에 돌아왔다. 우리는 다른 순례자에게 불편을 끼친 건 아닌지 걱정됐다. 내일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입성한다는 설렘으로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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