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답사여행(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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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진평왕릉
* 慶州 眞平王陵* 사적* 현지 안내판(요약)이 능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손으로 작은아버지인 제25대 진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이 하늘로부터 '옥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54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고구려의 공격에 맞섰고 중국 수, 당과 수교하였으며 여러 승려를 중국으로 유학 보내는 등 불교 진흥에도 힘썼다. 남산신성을 쌓고 명활성을 고쳐 짓는 등의 수도 방어를 강화하였다. 진평왕이 죽었을 때 한지(漢只)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능은 자연석으로 만든 둘레돌의 일부가 표면에 드러나 있다. 경주 시가지의 동쪽 명활산과 낭산 사이의 보문 들에 있다. 낭산 북동쪽 들의 이름이 한지원(閑地原)이라는 점에..
2025.02.07 -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 석탑
* 慶州 南山 昌林寺址 三層石塔*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창림사지는 '창림'이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되면서 그 이름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 최초의 왕궁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절터는 동쪽이 서쪽보다 높은 지형인데 동편의 가장 높은 곳에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에 3층의 몸돌을 올렸다. 무너져 있던 것을 1976년 복원하였는데 이때 없어진 부분은 새것으로 채워 넣었다. 아래층 바닥돌에는 각 면마다 3개씩 안기둥을 새기고, 위층 바닥돌에는 네 면에 각각 2구씩 팔부신중상을 조각했는데 현재 4구만 남아 있다. 탑에서 발견된 탑지에는 신라 문성왕(재위 839~857) 때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탑은 경주 남산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
2025.02.06 -
경주 용명리 삼층 석탑
* 慶州 龍明里 三層石塔*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삼층석탑 주변은 일찍이 민가가 들어서 절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마을의 옛 이름이 명장리였기 때문에 '명장리 삼층석탑'으로 불려 왔다.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에 3층으로 몸돌을 올린 일반적인 신라 석탑 형식이다. 바닥돌은 아래, 위층 모두 모서리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새겼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만들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모두 5단이고 처마 모서리를 가볍게 치켜 올렸고,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였으나 2005년 건천초등학교에 있던 받침돌인 노반을 옮겨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43년에 해체, 수리할 때 청동 불상 1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탑 외형은 단순하지만 8세기 신라 석탑의 반듯함을 보여 ..
2025.02.05 -
경주 황오동 삼층 석탑
* 慶州 皇吾洞 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현지 안내판(요약)황오동 삼층석탑은 배반동의 장골 사자사 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6년 경주역[구 경주역]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석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에 3층으로 몸돌을 올렸는데, 이는 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다른 석탑과는 달리 바닥돌 위에 받침 없이 곧바로 몸돌을 올렸다. 또한 1층 몸돌은 폭에 비해 높이가 높은 데 반해 2층과 3층 몸돌은 1층보다 폭이 조금 줄고 높이가 급격히 줄어 전체적으로 날렵한 형태를 띠고 있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 위에 그릇 모양의 장식인 복발을 만들어 올렸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타나는 석탑 양식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답사 노트: 경주를 오가며 -현재는..
2025.02.04 -
경주 남산동 동, 서 삼층 석탑
* 慶州 南山洞 東.西 三層石塔*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동, 서 삼층석탑은 서로 다른 형식이다. 서탑은 일반적인 신라 석탑 형식이고 동탑은 벽돌탑을 모방한 석탑이다. 동탑은 바닥돌 위에 8개의 직사각형 돌을 2단으로 쌓아 받침돌을 구성했다. 1층 몸돌을 놓기 위해 3단으로 몸돌 받침을 두었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도 새기지 않았다. 지붕돌은 벽돌탑처럼 아래 위쪽 모두 계단식으로 처리하였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놓기 위한 받침돌인 노반만 남아 있다. 서탑은 2층으로 된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렸으며, 위층 받침돌 4면에 2구씩 팔부신중상을 새겼다..* 답사 노트: 서출지에서 칠불암길을 따라 500m쯤 지나니 도로 가까이 우뚝한 탑이 보였다. 무슨 탑? 차를 세우고 다가가니 남산동 동, 서 삼층 ..
2025.02.03 -
보물단지 경주에서
1.활성리에서 감산사지 삼층 석탑을 찾아가는 길에 원성왕릉(괘릉으로 불리기도 함)이 보였다. 그냥 지나치기에 섭섭해 차를 세웠다. 지난 8월 왔을 때는 잡초가 무성했는데 그동안 말끔히 정비했다. 한두 곳도 아닌데 경주시 관계자분들이 고생 많다. 원성왕릉은 사적으로 지정됐고 능묘의 화표석인 석주 2점과 무인상 2점, 문인상 2점, 돌사자 4점 등 10점은 일괄 보물로 지정됐다. 경주 원성왕릉(괘릉)이른 점심을 먹고 을 찾아갔다. 평일이어서 도로가 한산해 즐거운 마음을 더 했다. 왕릉에 도착하니 햇볕이 따가워 그늘에 들어가니 벗어나기 싫었다. 주변에 잡초가 길게 자랐다. 추석이 목전iloveeverydaynature.tistory.com2.황복사지에서 나원리 오층 석탑을 만나러 가다가 또 하나의 보물을 지..
2025.02.02 -
경주 나원리 오층 석탑(국보)
* 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현지 안내판(요약)오층 석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에 5층의 몸돌을 올렸는데, 그 구성이 독특하다. 1층 몸돌은 4개의 돌을 짜맞추었고, 2층부터 5총까지의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과 2층 지붕돌은 아래쪽 처마받침돌과 위쪽 지붕돌을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 올렸고, 3층부터 5층까지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지붕돌의 경사면 모서리에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2~3개씩 남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이 있고, 머리장식의 중심을 세운 쇠기동인 찰주가 부러진 상태로 남아 있다. 1996년에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함께 금동구층탑 3기, 금동삼층탑 1기, 금동불상, 먹으로 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파편 등이 발견되..
2025.02.01 -
경주 황복사지 삼층 석탑(국보)과 미완성 왕릉
*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국보* 현지 안내판(요약)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 석탑이다. 바닥돌의 각 면마다 2개씩 안기둥을 새기고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지붕돌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만 남아 있다. 기록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그 아들인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706년에 다시 부처님 사리와 순금 불상 등을 봉안하여 신문왕과 효소왕 두 왕의 명복, 왕실의 번영, 그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고 한다.1942년에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과 순금으로 만든 불상 2구, 유리구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사리함..
2025.01.31 -
경주 마동 삼층 석탑
* 慶州 馬洞 三層石塔* 보물* 현지 안내판(요약)석탑은 2층으로 된 바닥돌에 3층의 몸돌을 올린 형태로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른 석탑이다. 바닥돌은 아래층이 4개, 위층이 8개의 돌로 짜여 있으며, 각 층마다 모서리 기둥과 2개의 안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몸돌과 지붕돌은 서로 다른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으로 층이 나 있고, 네 귀퉁이의 아랫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석탑이 있는 이곳은 장수사 터로 전해진다. 불국사의 석탑을 수리할 때 장수사에서 돌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사냥을 좋아했던 김대성이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을 잡은 뒤 산 밑 마을에서 유숙하였다. 꿈에 죽은 곰이 나타나 자신을 위해 절을 세워달라고..
2025.01.30 -
경주 감산사지 삼층 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감산사지 삼층 석탑* 甘山寺址 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현지 안내판(요약)석탑은 감산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삼층 석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 다시 세웠다. 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형태인데, 2층과 3층의 몸돌은 없어지고 1층 몸돌 위에 지붕돌만 3층으로 쌓아 놓은 상태이다. 바닥돌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이 모두 있으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이 있고, 네 귀퉁이는 치켜 올라간 모양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그 일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봉..
2025.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