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31. 08:06ㆍ여행의 추억

*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 국보
* 현지 안내판(요약)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 석탑이다. 바닥돌의 각 면마다 2개씩 안기둥을 새기고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지붕돌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만 남아 있다. 기록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그 아들인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706년에 다시 부처님 사리와 순금 불상 등을 봉안하여 신문왕과 효소왕 두 왕의 명복, 왕실의 번영, 그리고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1942년에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과 순금으로 만든 불상 2구, 유리구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사리함의 뚜껑에는 탑을 건립하게 된 이유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탑은 건립 시기가 명확하다. 또 감은사지 동, 서 삼충석탑(국보), 고선사지 삼충석탑(국보)과 비교함으로써 통일신라 시대 초기 석탑의 변화 과정을 파약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 답사 노트: 답사를 다니면서 국보와 보물의 차이를 몰라서 국가유산청 자료를 찾아봤다. 국보 지정 기준은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으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큰 것 ◇제작 연대가 오래되었으며, 그 시대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보존 가치가 큰 것 ◇조형미나 제작 기술이 특히 우수하여 그 유례가 적은 것 ◇형태·품질·제재(製材)·용도가 현저히 특이한 것 ◇저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것이라고 돼 있었다. 범부로서는 알듯 말듯 어렵다. 석탑이나 마애불 중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시각적으로 ◇규모가 우람하고 ◇손상이 적고 ◇조각이 뚜렷하고 섬세했다. 국보인 황복사지 삼층 석탑을 멀리서 보면 여느 탑과 비슷해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우람하게 컸다. 듬직해 믿음직스러웠다. 장식이나 아무 조각도 없이 단순했는데도 위용이 당당했다. 천년 넘은 세월 동안 훼손도 적어 '국보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석탑 앞으로는 너른 평야다. 아마 옛적부터 논밭이었을 것이다. 들판 한가운데 다량의 석재가 시커멓게 널려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엇일까 궁금해 마른 잡풀을 밟아 현장에 갔다. 각종 석재가 가지런히 정렬돼 있는데 무늬가 새겨진 것들도 많았다. 석재 인근에 능을 지으려고 원으로 형태를 잡다만 듯한 모형이 있었다. 경주시 문화재과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은 출토된 석재가 통일신라 시대 '경주 낭산 추정 고분지 미완성 왕릉 석재'라고 써 놓았다. 왕릉의 주인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으로, 5년간 짧은 재위 기간 중 병석에 있을 때 능침을 준비하다가 왕의 유언으로 화장하게 돼 조성 과정에서 폐기됐던 것으로 추정했다. 왕릉 조성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발굴된 석재를 모아 현 위치에 임시로 정비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출토된 십이지신상은 문무왕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지 복원에 사용됐다. 제30대 문무대왕만 동해에 산골 한 줄 알았는데, 제34대 효성왕도 화장해 동해에 뿌려졌다.
황복사지 삼층 석탑을 보러 갔다가 의외로 미완의 효성왕 가릉 터까지 만난 답사였다. (202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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