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DAY | 비암비스띠아 > 까르떼누엘라 리오삐꼬

2024. 12. 30. 00:02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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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09:03경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를 당하신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국가 애도 기간: ~2025.1.4.)




12 DAY | 비암비스띠아 > 까르떼누엘라 리오삐꼬

2019.4.1.(월), 흐림.
30.8km(288.6km) / 7시간 50분



어제(3.31.)부터 서머타임이 맞았다. 길을 나섰다. 출발 시각을 한 시간 앞당기니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종일 30km를 걸었다. 날씨가 흐려 걷기가 좋았다. 비가 올까 봐 평소보다 걸음을 서둘렀더니 몸이 물먹은 솜처럼 됐다. 하지만 마음만은 가뜬했다.


알베르게를 나와 한 시간쯤 걸으니 밀밭 입구에 철창으로 막은 작은 돌 움막이 나왔다. 이 움막은 부르고스를 만든 ‘돈 디에고 로드리게스 뽀르셀로스’ 백작이 말년을 외롭게 보낸 곳으로 산 펠리세스 수도원 Monasterio de San Felices de Oca의 유적이다. 잠시 뒤 비야프랑까 몬테스 데 오까에 도착했다. 오까산을 오르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레스토랑 el Pajaro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덩치 큰 손님들로 식당이 떠들썩했다. 주차장에 대형 화물차가 많이 주차해 있었다.

산티아고 교구 성당


레스토랑 옆 오까산 입구에는 18세기 후반에 건립된 산티아고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이 우뚝 서 있었다. 오르막이 좌우로 몸을 비틀며 낑낑대는 우리들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우린 한배를 탄 듯 서로가 숨이 찼다. 헐떡이며 오르는 데 저만치 앞서 맥없이 걸어가는 여성이 보였다. 한국인이었다. 식수를 깜박 빠트린 모양이었다. “대전에서 혼자 왔다. 미안하지만 물 한 모금만 주십시오.”라고 힘없이 말했다. 나는 물을 별로 마시지 않았다. 물 한 병을 지니고 다니지만, 하루 구간을 마칠 때까지 입에 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물병을 통째로 건네주었다. 여대생이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무사히 걸으라고 격려하고 우리가 앞서 나갔다. 급수공덕이란 격언이 생각나 스스로 기분이 좋아졌다. 강아지 같은 새까만 털북숭이 성견을 세 마리나 데리고 다니는 순례자를 만났다. 말과 행동이 유별났다. 알베르게에서 만난 이태리 친구도 만나 오까산이 만남의 길 같았다.


오까산은 떡갈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했다. 예전에는 이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도둑과 강도가 많았다고 했다. 가짜 돈을 순례자에게 주면서 잔돈으로 바꿔 달라고 사기치는 장소라고도 소문이 나 있었다. 신의 길에서 남을 해코지했다니 간이 크고 악독하다. 지금은 치안이 잘 돼 있고 아주 넓은 방화선도 생겨 길을 잃을 염려도 돈을 빼앗길 걱정도 없다. 카미노에서는 새벽이나 인적이 드문 곳, 기상이 나쁠 때는 간혹 길을 잃을 염려가 있으나 이 길은 넓고 직선이라 안전하게 느껴졌다.

스페인 내전 희생자 기념탑

오까산 쉼터에서 발견한 태극기 그림


스페인 내전 희생자 기념비를 지나 쉼터에 도착했다. 흰색 페인트로 el Oasis del Camino를 적어 놓은 커다란 나무에 토속적인 장식이 나부꼈다. 순례자가 많았던 성수기에 장사를 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림 장식에는 태극기도 있었다. 한국인 순례자가 엄청 많다는 증거다. 간식으로 바나나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데 손명락이 하모니카를 불어 잠시 쉬는 동안 분위기를 운치 있게 했다. 따분한 방화선을 두 시간 정도 걸어 산 후안 데 오르떼가 수도원Monasterio de San Juan de Ortega에 도착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수도원에는 산 후안 오르떼가 성인의 석관이 모셔져 있다. 점심시간은 안 됐지만 다음 마을이 멀어 수도원 옆 바르에서 바게트를 주문했다. 빵이 나왔다. 길이가 팔뚝만 했다. 반을 잘라 배낭에 넣었다.

산 후안 데 오르떼가 수도원


산 후안 데 오르떼가를 벗어나니 갈림길 표지판이 나왔다. N-120 도로를 따라 계속 이동하는 왼쪽 루트와 아헤스로 가는 오른쪽 루트였다. 우리는 중세부터 순례자들이 많이 이용했다는 아헤스 쪽을 택했다. 도로에서 숲길로 들어서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적한 오솔길을 지나 드넓은 목장 지대를 거쳐 구릉에 폭 싸인 아헤스에 도착했다. 예쁜 장식을 붙인 가정 집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아헤스에서 아따뿌에르까까지는 도로를 따라 이어지고 중앙선이 없었다. 걸음이 굼떴다.


원시인 마을로 불리는 아따뿌에르까는 1994년 80만 년 전에 살았던 ‘호모 앤티세스Homo antecessor'가 발굴되어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마을 끝 샘에 원시인 상을 세워 놓았다. 왼쪽 오르막 산길을 따라 한참 오르니 십자가가 있는 정상이 코앞이었다. 정상은 평평한 고원 지대였다. 외롭고 쓸쓸한 분위가 물씬 풍겼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 땀을 식히기에는 그만이었다. 잡담이 길어졌다.


고원 지대가 끝나자 내리막길이었다. 우측 멀리 채석장과 통신용 안테나가 여러 개 보였다. 갈림길에서 한 무리의 순례자는 왼쪽으로 가고 우리는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우측으로 나아갔다. 흙길이 끝나자, 도로가 나왔다. 도로를 걷는 건 지루하다. 그렇지만 걸을 때는 걷는 것만 생각하고 걷는 자체의 즐거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도 대신 걸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두 다리와 두 발에 감사하며 묵묵히 걸었다. 드디어 까르떼누엘라 리오삐꼬에 도착한 것이다. 한 건물 벽에 순례자 풍자 그림이 보였다. 불필요한 물품을 한가득 지고, 낑낑대는 순례자였다. 배낭이 무거울 수록 피로도가 가중되어 체력이 손상된다. 배낭의 무게는 10kg이내가 좋다. 길 건너에 바르 알베르게 무니시빨 라 파라다la Parada가 있었다. 수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이 깨끗했다. 한 시간쯤 뒤, 창녕 부부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다.


한 알베르게 광고물. 태극기가 선명하다.

까르떼누엘라 리오삐꼬의 순례자 풍자 그림.
부자가 자전거를 연결해 타는 모습.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