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DAY | 아소프라 > 그라뇬

2024. 12. 28. 04:26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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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30.(토), 맑음.
23km(234.8km) / 6시간 55분




카미노 대부분은 흙길이거나 비포장 자갈길이다. 이런 길은 자박자박 발소리와 함께 사색의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잡생각도 발걸음에 짓밟힌다. '프랑스 길'Camino frances은 아침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 향한다. 외로운 생각이 들 때는 그림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림자는 또 다른 나 자신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늘이 없는 오늘 같은 날, 만약 동에서 서로 향한다면 얼마나 눈이 부시고 지루할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현기증이 난다. 어느덧 열흘째, 대중가요 ‘나그네 설움’의 가사처럼 오늘도 걷는다.


나헤라에서 출발하는 김○주와 보조를 맞추려고 평소보다 느지막이 아소프라 임시 알베르게를 출발했다. 30여 분 기다리는 동안 손명락이 하모니카를 불었다. 한 뼘 남짓한 하모니카는 가지고 다니기에 편리하다. 무엇보다 음향기기 없이도 들숨과 날숨만으로 불 수 있으니 매력 있다. 추억의 소리를 들려주는 연주 솜씨가 여간 보통이 아니다. 이런 분위기일 때는 낭만 가객 같다.


김○주와는 한 시간쯤 뒤 갈대숲 길에서 조우했다. 봄 햇살처럼 명랑한 여성이고, 혼자 왔고, 걷는 구간도 같고, 딸 보다 어린 나이라 어지간하면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함께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면 계산은 우리가 먼저 했다.


밀밭과 포도밭, 유채밭이 번갈아 나타났다. 갈수록 따사로워지는 봄볕에 유채꽃이 만발했다. 아소프라에서 두 시간을 걸어 만난 첫 마을 시루에냐 입구는 골프장이었다. 리오하 알타 골프 클럽Rioja Alta Golf Club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그린을 감상했다. 이런 분위기에선 커피보다 녹차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프를 하는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마을을 지나는 데 인적은 드물고 주택을 판다는 현수막이 많이 내걸렸다.


시루에냐를 벗어나자 드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푸른 밀밭과 노란 유채밭이 걷는 동안 눈맛을 높여주었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는 도시형 큰 마을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자그마한 브라질식 카페테리아에 들어갔다. 햄버거와 오렌지주스를 주문해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금방 만든 음식이 맛이 정말 좋았다. 주인이 깨끗이 비운 접시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대성당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에 다다랐다. 그곳은 닭에 관한 전설이 구전돼 전해오는 특이한 곳이었다.
14세기에 독일 윈넨뎀 출신의 우고넬이라는 18살 청년이 부모님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를 하다가 이곳의 한 숙소에 묵었다. 숙소 주인의 딸이 청년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녀는 구애했지만, 청년이 거절했다. 분노한 처녀는 복수하려고 훔친 은잔을 청년의 가방에 몰래 넣고 도둑으로 고발했다. 재판소에 끌려간 우고넬과 그의 부모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청년은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절망에 빠진 그의 부모는 산티아고 성인에게 기도를 올리며 순례를 계속했다. 돌아오는 길에서 “산티아고의 자비로 아들이 살아있다”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교수대에 다시 들렀다. 아들이 살아있었다. -중세에는 경고의 의미로 교수대에 처형한 사람의 시신을 그대로 두는 풍습이 있었다- 부모는 즉시 재판관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말했다. 마침, 닭고기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하려던 재판관은 그들의 말을 듣고 “당신의 아들이 살아 있다면 내가 먹으려 하는 이 식탁의 닭들도 살아 있겠구려” 하며 빈정거렸다. 바로 그때 식탁의 닭들이 접시에서 뛰쳐나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를 본 재판관은 즉시 교수대에서 그 아들을 풀어주었다.
산또 도밍고의 재판관들은 우고넬의 결백을 믿지 않았던 것에 대한 사죄로 몇백 년 동안 목에 굵은 밧줄을 매고 재판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 전설을 인연으로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는 청년 우고넬 고향인 독일의 윈넨뎀과 1993년 자매결연을 했다.

중세 순례자들은 여행 중에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듣기 좋은 징조로 여겼다.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는 지금도 성당 안에 닭장을 만들어 14세기의 기적에서 유래한 흰 닭 한 쌍을 키우고 있으며 3주에 한 번씩 닭을 교체한다. 순례자들이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무사히 순례 여행을 마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결혼식이 열리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조금 아쉬웠다.

용감한 십자가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에서 그라뇬으로 가던 중 들판에서 검은색 십자가를 발견했다. 그 앞에 ‘CRUZ DE LOS VALIENTE'라고 쓰인 팻말이 꽂혀있었다. 구글로 번역하니 용감한 십자가이었다. 검은색 십자가도 드물고 용감한 십자가의 연유가 궁금했다. 역사적으로 그라뇬 일대의 비옥한 땅은 늘 다툼의 대상이었다. 19세기 초에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와 그라뇬 두 마을 사이에 위치한 밭을 두고 싸움이 났다. 마을 대표 한 명씩 뽑아 결투해서 이긴 쪽 마을이 땅을 차지하기로 했다. 그라뇬의 마르띤 가르시아가 싸움에서 이겼다. 마을 사람들은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결투를 벌인 자리에 검은 십자가를 세웠다. 땅을 두고 침략하고 전쟁을 벌인 사건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다양하지만, 마을과 마을이 1:1 결투로 분쟁을 해결한 사례는 드물 것 같다. 검은색 십자가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산 후안 바우띠스따 성당


산 후안 바우띠스따 성당Iglesia de San Juan Bautista이 운영하는 라뇬 공립 알베르게는 내부 수리 중이었다. 순례 성수기를 대비해 보수하는 모양이었다. 사설 숙소를 찾으려는데 한 여인이 다가왔다. 괜찮은 호스텔이 있다면서 안내를 자청했다. 그녀는 La Casa de Las Sonrisas Hostel의 주인장이었다. 저녁과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제공하고 도네이션이라는 데 솔깃했다. 숙박 등록을 하려고 순례자 여권을 내밀었더니 필요 없다면서 스탬프 날인을 해주지 않았다. 호스텔 건물은 두터운 흙벽으로 천장이 낮아 아늑해 보였다. 중세의 전통 가옥 같아 그런대로 매력 있었다. 그러나 온수가 부족하고 건물 전체가 난방되지 않아 몸이 떨렸다. 잘 때는 빈 침대의 담요를 가져와 겹으로 포개 덮어야만 했다. 저녁 식사는 빵과 우유, 콩 수프, 비스킷, 커피와 차가 나왔다. 투숙객들이 기다란 식탁에 둘러앉았다. 한국인 7명과 타이완,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사람 각 한 명씩 모두 11명이었다. 식사하면서 영어로 대화가 오고 갔으나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끼어들 수 없었다. 이탈리아 여성이 말을 많이 했다. 무슨 말인가 궁금해 김○주에게 물었더니 “스페인과 로마의 유적을 비교해 보니, 스페인은 입장료를 받고 로마는 받지 않는다. 로마는 길거리의 유적이 매우 다양해 로마 유적을 1등으로 친다.”라는 요지라고 했다. 나도 로마에 가 보았기에 한편으로 그럴듯한 의견 같았다. 그러나 입장료로 유적의 가치를 판단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주는 뭐라고 대답하며 재밌게 대화에 빠져들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에 헛웃음을 짓기 싫어 뒤뜰로 나왔다. 이탈리아 여성도 곧 따라 나오더니 줄담배를 연거푸 피워댔다. 속상해 보이진 않고 대단한 골초 같았다.

순례자 여권에 호스텔 스탬프를 받지 못해 밖에서 받으려고 바르 마이웨이에 갔다. 맥주를 마시며 스탬프를 받았다. 안주로 절인 올리브 열매가 나왔는데 너무 맛있었다. 귀국해 김상기가 코스트코에서 구입해 나누어 주길래 한동안 맛있게 먹었다. 주인에게 내일(3.31.)부터 서머타임이 적용되느냐고 물으니 “모르겠다.”라면서 “서머타임은 여름에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가이드 북에서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서머타임을 적용’한다고 읽었는데 지역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의아했다.


부엔 까미노 한글을 누가 적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