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DAY | 나바레떼 > 아소프라

2024. 12. 28. 04:25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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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29.(금), 맑음.
25.1km(211.8km) / 6시간 40분



오전 7시 15분 나바레떼를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김○주가 숙소에 지갑을 두고 왔다며 황급히 되돌아갔다. 분실할까 봐 베갯잇 밑에 둔 것을 깜박했다. 다행히 지갑을 찾았다. 이국땅에서 지갑을 잃어버린다면 큰 낭패다. 우리도 지갑을 잃지 않으려고 샤워할 때도 두 사람씩 교대로 한다.


벤또사의 바르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김○주를 기다렸다. 지쳤는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벤또사를 벗어 날쯤 ‘알비아 와인’ 회사가 나타났다. 마당에 들어서니 건물만 덩그렇고 저장고가 보이지 않았다. 와인병이나 용기를 만드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그곳 마당에 들어선 이유는 와인보다 수백 년 됨직해 보이는 거대한 올리브 나무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고목과 생김이 너무 달랐다. 둥치가 크고 키는 작달막했다. 나무가 희극적으로 생겼으나 특별한 기품이 있어 보여 나그네 발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카미노 프랑스' 루트는 하늘이 파랗고 땅은 푸른, 어디를 가나 풍광이 수려해 눈이 시원했다. 그동안 초록 융단의 밀밭 지역이 이어졌다가 어제부터는 붉은 황토에 뿌리를 내린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길이 꽤 멀었다. 네 명이 걷지만, 개인의 컨디션에 따라 빠르거나 뒤처지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결국 카미노는 혼자 걷는 고독의 길이었다.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느긋하게 걷는 것만이 서로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일이었다. 탁 트인 고요의 길을 침묵으로 걸으니, 자신도 모르게 즐겁고 괴로웠던 지난 일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길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거친 숨, 흐르는 땀으로 값을 치러야만 제대로 알려주려나. 걷는 내내 길의 얼굴은 내가 마음먹는 대로 보여준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흘러갔다. 답은 마음속에 있는 게 분명했다. 남은 생은 부디 길을 잃지 않기를 다짐했다. 햇살이 등을 어루만진다. 마음이 정갈해진다. 돌아갈 때는 조금 더 성장한 마음으로 갈 수 있기를 진실로 바랐다. 카미노를 걷는다는 것은 짧은 수행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천사들의 성모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Nuestra Senora de Los Angeles


아소프라는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소리쳐 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우선 시장기를 달래려고 바르 세비야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임시 알베르게 위치를 듣게 됐다. 임시 알베르게는 ‘천사들의 성모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Nuestra Senora de Los Angeles’의 자투리 건물에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제 배달이 잘못된 창녕 부부의 배낭이 주인을 잃어 동키 카드를 매단 채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숙소를 살펴보는데 김○주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침에 왕복으로 뛰어 진을 뺐더니 다리가 아파 나헤라에 투숙했다'라면서 '대구 F4 아부지들 푹 쉬세요. 낼 부지런히 따라갈게요'라고 안부를 전해왔다. 걱정했는데 안심이 됐다. 당치 않는 F4라니, ○주 센스 있다!

임시 알베르게 관리인


임시 알베르게에서 관리인에게 전화하니 금방 와주었다. 머리숱이 듬성듬성한 중년은 호인 상이었다. 그는 “비수기여서 성당 건물을 임시로 빌려 제공하고 있다”라면서 “사용료는 없다”고 했다. 관리인은 스페인말로 하고 우리는 한국말을 하는 데도 서로 알아듣는 것이 신통방통했다. 궁측통인가? 숙소가 클래식하면서 아늑해 보였다. 관리인이 돌아간 후 임시 알베르게는 우리의 독차지였다. 원하는 방을 골라 배낭을 먼저 풀고 신발을 말리려고 햇볕에 내놓았다. 일행의 등산화가 양지쪽에 가지런히 놓였다. 저 등산화로 전국의 산과 들, 제주 올레길과 둘레길을 누비고 일본 올레길도 다녀왔다. 긴 시간 군말 없이 함께 해준 낡은 신발이 대견스러웠다. 뒤늦게 뉴욕에서 왔다는 여성 순례자와 자전거 순례자가 차례로 들어왔다. 그들도 신발을 벗어 우리 옆에 줄을 세웠다.


카미노 9일째, 오늘까지 약 211km를 걸었다. 무릎이 좋지 않아 한국에서 준비해 온 진통제를 하루 세 번 복용했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 김상기가 가져온 바셀린을 발랐더니 하루 만에 가라앉았다. 김상기도 발뒤꿈치가 부풀어 올랐다. 바늘에 실을 꿰어 물을 빼내고 바셀린을 발랐다. 밤새 잘 아물었다. 바셀린이 물집의 특효였다.

카미노를 준비하면서 걷기 연습을 따로따로 했다. 단체 걷기는 한티재에서 파계사를 거쳐 아양교까지 20여km, 단 한 차례 했다. 그런데도 카미노에 와서 무리가 없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모두 열심히 연습한 걸로 여겨진다. 날씨도 좋았다. 카미노의 기상은 변화무쌍해 맑은 날씨가 연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는데, 9일째 청정한 날이 유지되니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카마노에서는 날씨 부조보다 더 좋은 도움은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