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 00:03ㆍ산티아고 순례길
2024.12.29.09:03경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를 당하신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국가 애도 기간: ~2025.1.4.)
14 DAY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 까스뜨로헤리스
2019.4.3.(수), 흐린 후 맑음.
20.2km(344.8km) / 5시간 5분
식당이 깜깜했다. 조식을 예약했는데 이상했다. 40여 분을 더 기다리다 식당으로 다시 내려가 불을 켰다. 빵과 우유가 탁자에 놓여있었다. 진작 불을 켜고 봤으면 되었는데 관리인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기다리는 동안 불만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기에 내가 과연 카미노를 걷는 순례자가 맞는가 싶었다. 여섯 시에 일어나 금쪽같은 두 시간을 허비한 뒤 알베르게를 나섰다.
오르니요스를 벗어나면 카미노는 메세타 지역이다. 스페인 전체 면적의 5분의 2에 달하는 메세타는 나무가 없고 밀밭과 초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메세타 끝자락에 있는 깐따브리아Cantabria 산맥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막고 반대로 더운 열기를 나가지 못하게 하므로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혹한이다. 800km 넘게 걸으려면 악천후와 고독감, 무료함을 이겨내야 한다. 가도 가도 쉽사리 끝이 안 나는 360도 들판이 낯설지만 경이롭다. 사방을 둘러보니, 마치 둥근 접시 속에 홀로 선 느낌이다. 검은 구름마저 머리 위에 내려앉아 무거운 정적에 휩싸이게 했다. 침묵을 배우라고 압박하는 것 같았다.
하늘을 나는 새는 보이지 않는데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다. 성당이 많은 곳이라 새들도 기도하나 싶어 웃음이 났다. 초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새 떼가 깡충거리며 노닐었다. 고도계는 900m를 나타냈다.
산 볼 입구 표지판이 나왔다. 왼쪽 숲에 가려진 외딴집 하나가 보였다. 생장피드포르에서 받은 리스트에는 알베르게로 표시돼 있다. 멀리서 봐도 건물이 허술하고 으스스해 보였다.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1503년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을이 버려졌다고 한다. 현재도 카미노에서는 수수께끼로 알려져 있다. 산 볼에서 한 시간을 걸어 온따나스에 닿았다. 바르에서 휴식한 후, 다시 걷는 카미노는 포플러가 늘어선 산등성이를 따라가다가 도로로 이끌었다. 한적한 도로에는 폐허가 된 산 안똔 수도원Convento de San Anton이 적막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황폐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수도원 건물과 성당 건물의 아름다운 아치가 좌우로 연결돼 있다. 아치는 수도원의 출입문이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도로가 아치를 통과한다.
산 안똔 수도원에서 까스뜨로헤리스에 이르는 길은 평탄한 자동차 도로였다. 멀리 지평선 끝에 산따 마리아 델 만사노 부속 성당Colegiata de Santa Maria del Manzano과 언덕 위 까스뜨로헤리스의 성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하지만, 지루하게 걸어야 했다. 마을에 들어서고도 공립 알베르게에 가려면 언덕과 골목길을 거쳐 마을 끝까지 가야 했다. 골목길에서 본 산또 도밍고 교회Iglesia de santo Domingo의 외벽에는 기이하게 해골 모형 두 개가 조각돼 있었다. 만화에서 본 해적선의 깃발 문양이다. 해골바가지에는 무언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듯하다.
오후 한 시가 지나 까스뜨로헤리스 공립 알베르게에 등록했다. 도미토리 침상이 30인용이었다. 비교적 방이 넓고 컬러풀한 매트리스가 놓여있었다. 그중에 1인용 침상이 두 개 보였다. 늦게 오는 순례자용이라고 했다. 피로한 순례자를 위한 관리자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침상 2층은 오르내리며 이용해야 하기에 불편하고 번거롭다. 그런데도 김상기와 황경엽이 주로 2층을 이용했다. 배려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맙다.
가까운 카페를 찾아 점심을 먹은 후 마켓에서 식품을 샀다. 사 온 와인을 주방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누군가 꺼내 몰래 반을 마셔버렸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으나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넷이 함께 매일 두 병의 와인을 나누어 마시는 것이 낙이었는데…. 저녁을 먹으려던 중 부 관리인이 들어왔다. 구레나룻이 턱 아래까지 길게 덮인 그는 삼 년 전 손명락과 안면을 튼 터라 환하게 맞아주었다. 기분이 전환되었다. 다른 순례객도 덩달아 좋아해 다 같이 즐겁게 지냈다.
알베르게를 나와 언덕 위에 올라갔다. 짙은 노을이 어둠 속에 갇히고 있었다. 카미노를 걸으면서도 오늘은 겸손하지 못하고, 이타심을 가지지 못했음을 알아챘다. 늦은 아침과 빼앗긴 와인으로 언짢았던 마음을 늦게야 자성했다.
■ 온따나스, 꼰셉시온 성모 성당Iglesia de Nuestra Senora Concepcion
■ 온따나스, 산 비센떼 성당Ermita de San Vicente 유적.
■ 산 안똔 아치Arco de San Antón
■ 까스뜨로헤리스, 13세기에 만들어진 산따 마리아 델 만사노 부속 성당Colegiata de Santa Maria del Manzano
■ 가스뜨로헤리스, 산또 도밍고 교회Iglesia de Santo Domingo의 해골장식 벽
■ 산또 도밍고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to Domi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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