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31. 00:07ㆍ산티아고 순례길
12.29.09:03경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를 당하신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국가 애도 기간: ~2025.1.4.)
13 DAY | 까르떼누엘라 리오삐꼬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2019.4.2.(화), 맑음.
36km(324.6km) / 9시간 50분
어제 남겨둔 바게트 조각을 꾸역꾸역 삼키고 부르고스로 향했다. 서머타임으로 7시에도 깜깜했다. 갈림길이 나오면 손전등으로 노란 화살표를 꼭 확인했다. 부르고스 가는 길은 차량이 많이 다니는 도로였다. 바짝 긴장됐다. 순례길은 오솔길, 들길, 산길, 강변길, 자갈길, 아스팔트길, 골목길 등 길이란 길은 모두 밟게 된다. 주변 환경에 맞추어 생겼으니 어느 길이 좋다, 싫다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때그때 환경에 맞추어 길의 모습이 나온다. 걷기에는 흙길이 더없이 좋으나 눈비가 내리면 진창길이 됐다. 같은 길이라도 좋을 때가 있고 아닐 경우도 있으니, 우리네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다.
고속도로 다리를 건너 부르고스 공항 담장에 왔을 때쯤 사위가 밝아왔다. 구름이 햇살을 받아 연분홍 꽃처럼 피었다. 철길 다리를 지나 공업단지에 다다랐다. 공장들이 하나같이 큼직큼직했다. 프랑코 독재 시절에 조성한 직물, 화학, 고무 공장 덕분에 부르고스는 오늘날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영웅 엘시드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성당에는 그의 관이 있고 그의 동상과 집을 시내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부르고스주’의 수도이기도 한, 부르고스는 20만 정도의 인구에 비해 규모가 매우 커 보였다. 공업단지가 끝날 무렵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콘 레체’를 주문하니 주인이 빵 한 조각을 곁들여 주었다. 순례자에 대한 배려가 마음을 적셨다.
인도 블록에 박힌 카미노 사인을 따라 부르고스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산따 마리아 대성당)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해 놀랐다. 카미노에서 큰 성당을 보긴 했으나 이렇게 압도하는 성당은 처음이었다. 언젠가 눈을 사로잡았던 달력 속의 성당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었다. 1221년부터 짓기 시작해 16세기에 완공된 대성당은 스페인에서 3번째로 큰 규모라고 했다. 오랜 세월을 버티고도 손상 없이 위풍당당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대성당은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겉만 보고 발길을 돌렸다. 갈 길이 바쁘다는 이유로 수박 겉핥기 했으니 지금 와 생각하면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었다.
부르고스를 벗어나면 한동안 상점이 없는 들판이어서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면서 탐스러운 빨간 딸기가 너무 먹음직해 샀다.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바로 먹었다. 시원한 꿀맛 같았다. 비얄비야 고속도로 다리 밑에서 점심을 먹을 때까지 딸기는 잠시나마 허기를 달래주었다. 점심은 바게트 한 조각과 바나나 한 개였다. 양이 부담스럽지 않고 딱 맞았다. 장거리 걷는데 많이 먹으면 여러 가지 불편을 초래한다.
부르고스에서 라베 데 라스 깔사다스까지는 부드러운 산책길이 이어지고 그 뒤부터는 전형적인 메세타 풍경이 나왔다. 부르고스에서 레온을 지나 아스또르가까지 약 200km가 넘는 카미노를 메세타Meseta라고 불렀다. 해발 600~1,000m의 고원 지대로 여름에는 사막과 같은 열기와 건조함을, 겨울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동토의 차가움을 선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세타는 순례자에게 진정한 순례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메세타가 주는 고독과 침묵이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의지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몸과 마음을 집중해 순례길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 들판은 고요했다. 들길을 밟으면 저절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앞으로 노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됐다. 먼지 나는 돌멩이투성이 길과 고원지대와 밀밭이 연달아 나타났다. 앞으로만 가야 하기에 인내심 운운할 수 없다. 인생길처럼 그냥 터벅터벅 걸었다.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 입구 내리막에서 지친 순례자 두 사람이 고랑에 빠져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달려가 도와주었다. 그들은 프랑스인이었다. “메르시, 메르시”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했다. 칠순이 넘어 보였는데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다 길에서 고랑에 빠졌는지 알 수 없었다.
요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니 산 로만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Roman이 보였다. 성당 앞 광장에 수탉을 장식한 탑이 이채로웠다. 수닭은 예수의 수난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공립 알베르게는 성당 아래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성 관리인이 석식과 조식, 침대 커버를 포함해 17유로를 받았다. 등록할 때는 좀 비싸다 싶었는데 저녁 요리로 나온 ‘쿠시쿠시’를 받아 드니 그렇지 않았다. 관리인에게 엄지척했다. 식사 후 우연히 브라질, 캐나다, 독일 청년들과 와인을 마시게 됐다. 언어 소통에 애로가 있었지만 눈치껏 주고받았다. 분위기가 업 돼 돌아가며 한 병씩 샀다. 서로 자기 언어로 말하는데도 아주 재미있었다. 술이 만국 공통어인 양 권커니 잣거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별난 경험이었다.
오늘은 크고 작은 성당을 많이 지나왔다. 원래 스페인은 가톨릭이 국교였던 만큼 성당을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봤다. 지금도 인구의 반이 가톨릭 신자라고 한다. 어제오늘은 걷기도 많이 걸어 하루치 일정을 앞당겼다. 전신이 뻐근하지만, 카미노 걷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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