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DAY | 피스떼라로 향해 > 라 페나

2025. 1. 27. 10:44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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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21.(일), 맑음.
32km(32km) / 8시간 24분



처음 계획은 산티아고 도착을 4월 24일로 잡았다. 몸 상태가 괜찮아 예정보다 며칠 앞당겨졌다. 어제(4. 20.) 도착했으니, 나흘이나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피스떼라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피스떼라 순례자 여권은 알베르게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아코디언 팸플릿에 스탬프를 받는 칸이 10개였다.
중세의 순례 전통은 산티아고에서 ‘피스떼라’로 가서 옷이나 신발을 태워야 순례가 끝났다. 지금은 소각 행위가 금지됐지만, 그때는 그렇게 했다고 한다. 피스떼라는 스페인 서해안에 있는 작은 항구다. 산티아고에서 서쪽으로 약 90km 떨어져 지리적으로 땅끝에 있는 마을이었다. 가톨릭교회는 피스떼라가 카미노의 종점이 아니며 순례에 해로운 비교(秘敎) 행위가 만연한 장소이므로 가는 것을 만류한다. 반면에 갈리시아주 정부는 관광 명소로 널리 홍보했다. 1997년 피스떼라 시에서 ‘피스떼라 야고보의 길’을 공식 지정하고, 시의 문장(紋章)에 ‘야고보 루트의 끝Fin da Ruta Xacobea'이라는 구절까지 넣었다. 우리들은 여유 일정을 소화할 겸 대서양 바닷가 피스떼라로 가는 데 의견을 모았다.


아침 여덟 시, 우성현의 전송을 받으며 느긋하게 알베르게를 나왔다. 우성현은 이틀 뒤에 도착한다는 친구 주○철을 만나려고 숙소에 남았다. 알베르게 문을 나오면 비탈 계단에 특이한 형상의 조형물이 있었다. ‘세 개의 무거운 짐을 끌고 가는 사람’이었다. 힘겨워하는 모습의 형상을 보면서 내게는 세 개의 짐 덩이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저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짐의 종류와 크기, 의미가 같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대성당으로 다시 갔다. 알베르게에서 피스떼라로 가려면 대성당을 지나야 했다. 번잡함이 사라진 조용한 오브라도이로 광장은 또 다른 매력을 주었다. ‘콤포스텔라’를 받아 들고 오는 김○주를 만났다. 8시 반인데 벌써 인증서를 받았다. 협회 사무실 문 여는 시간이 앞당겨졌다고 했다. 자원봉사자의 헌신 때문이다. 그들의 열정적인 노고에 머리가 숙어졌다. 광장을 나오니 산 프루끄뚜오소 성당Igrexa de San Fructuoso의 조형물에 햇빛이 들었다. 양지와 음지의 대비가 조화로웠다. 석재 건물 틈에 뿌리를 내린 들풀이 한 줌의 볕이라도 더 받으려 고개를 치켜든 모습이 암팡스러워 보였다.


도로를 따라가니 보도에 신발 밑창 모형의 사인이 보였다. 잠시 뒤 피스떼라 출발 0km 표지석이 나타났다. ‘피스떼라 89.586km’ ‘무시아 86.482km’ 두 개의 표식이 함께 붙어 있었다. 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날씨가 청명하고 따뜻했다. 빨갛고 까만 지붕이 어우러진 예쁜 마을과 마을 사이로 길이 이어졌다. 한갓진 시골길엔 순례자도 드물었다. 산티아고에서 카미노 공식 순례를 마쳤기에 긴장이 풀렸는지 흥미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땀브레 강rio Tambre 위에 놓인 뽄떼 마께이라Ponte Maceira 아치교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시 쉬었다. 다리 끝에 있는 자그마한 천주교 성당Ermida de San Braisdms은 그동안 보아왔던 성당과 차이가 컸다. 카미노에서는 마을마다 성당이 눈에 띄었지만, 이쪽으로는 그렇지 않다.
오후 한 시 반. 네레이라Negreira의 스낵바에서 점심을 먹었다. 순례자 여권을 꺼내 보니 아치교에서 스탬프를 받아야 하는 데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다. 칸을 메워야 하는데 마침, 길 건너 관광안내소가 보였다. 찾아갔더니 흔쾌히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그리고 여성 안내원은 시에스타 시간이라며 관광안내소 문을 자물쇠로 채웠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는 생각에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돌렸다.


네레이라에서 사스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왔다. 안내판의 거리는 도로가 가깝고 숲길이 멀었다. 우리는 숲길로 갔다. 숲은 우거졌고 조용했다. 흙길을 따라 계류에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넓은 곳에서는 조용히 흐르고, 좁은 곳에서는 쏼쏼 거리며 소리를 냈다. 스페인은 어디를 가든 물이 풍부했다. 손 글씨가 쓰인 노란색 화살표가 나타났다. 무슨 말일지 번역해 보았다. ‘자연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자매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합시다’라는 문구였다.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는 자연보호 안내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래선지 숲길이나 산길에 작은 쓰레기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숲길을 두 시간 걸어 라 페나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산골의 알베르게가 아늑했다. 알베르게 후문은 숲길에서 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정문 앞은 도로였다. 황경엽이 와인 두 병을 사서 치즈 안주로 한턱냈다. 그는 “오늘 숲길에서 길을 이탈해 다른 곳으로 갔는데 찾으러 와 준 것”과 “카미노에서 넘어져 이마를 다쳤을 때 데리러 와 준 것”에 대한 감사라고 운을 뗐다. 말은 그랬지만 소강상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애쓰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고된 상황은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관대함을 배운다. 저녁은 알베르게 투숙객이 모두 모여 함께 식사 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여주인은 큰 마리아, 작은 마리아는 순진하고 귀여웠다. 둘은 자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