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DAY |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뿔라리오스 > 엘 부르고 라네로

2025. 1. 4. 00:10산티아고 순례길

728x90

2024.12.29.09:03경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를 당하신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국가 애도 기간: ~2025.1.4.)



17 DAY |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뿔라리오스 > 엘 부르고 라네로
2019.4.6.(토), 비, 우박.
31.4km(450km) / 7시간 54분



연일 비가 내린다. 그래도 거침없이 서쪽으로 향해야 하는 우리는 순례자. 비옷을 입고 알베르게를 나왔다. 과거의 템플기사단 정신을 존중한다는 관리인과 석별의 사진을 남긴다. 벗겨진 이마의 호인상인 그가 미소를 지으며 “부엔 카미노” 여정을 빌어주었다.


카미노를 걸을 때는 일행일지라도 나란히 함께 걷기는 어렵다. 보폭이 다를 뿐 아니라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몇 미터에서 몇백 미터 이상 떨어져 걷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는 손명락이 거의 선두를 고수하고 그다음은 김상기였다. 황경엽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사전에 예정된 순서는 아니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형태였다. 나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걸었다. 여정을 눈으로, 마음으로만 담으면 쉽게 잊힐 것만 같아 사진으로 담는다. 훗날 그날의 추억을 꺼내보면 또 다른 감동과 새삼스레 흥분을 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처럼 사진 기록을 저장했다.

산 또마스 성당
산 니꼴라스 주교 성당


노란 화살표를 따라 모라띠노스에 다다랐다. 마을 초입의 산기슭에 마치 방공호처럼 굴을 파놓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와인 저장고Bodega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저께 보아디야 델 카미노 마을에서 우리나라와 똑같이 생긴 석빙고를 보고 궁금했는데 그것도 와인 저장고였던 모양이다. 조금 더 걸으니 산 또마스 성당Iglesia de San Tomas이 나왔다. 거기에는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희한하게 나무에다 레이스를 감아 돌렸거나 삼각 깃발을 매달아 놓았다.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의 만국기처럼 바람에 펄럭거렸다. 알 수 없는 장식이었으나 정성을 들인 것만은 분명했다. 잠깐 사이 빨렌시아 지방의 마지막 마을인 산 니꼴라스 델 레알 까미노에 다다랐다. 카미노 마을이 대부분 그렇듯 조용했고 산 니꼴라스 주교 성당Iglesia de San Nicolas Obispo의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었다. 성당의 붉은 벽돌은 고전미와 더불어 위엄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빨렌시아 지방과 레온 지방의 경계 표석


마을을 나와 도로 옆 센다를 따라가니 까라스꼬 언덕이 나왔다. 멀리 지평선까지 밀밭이 펼쳐졌다. 작은 단으로 빨렌시아 지방과 레온 지방의 경계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표석을 지나 30여 분 더 가니 도로 바닥에 노란 사인이 보였다. 센다를 버리고 도로를 횡단했다. 센다를 따라가도 사아군이 나오고, 도로를 횡단해도 ‘다리橋의 성모 예배당Ermita de la Virgen del Puente’을 거쳐 사아군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다리 앞에서 숙소를 먼저 나갔던 이은철과 김○혜를 만났다. 카미노에서 만나 아는 사람이라 너무 반가웠다. 외로워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수한 벽돌로 지어진 교회가 예뻤다.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사아군 기차역을 돌아 구시가지에 도착했다. 빗방울이 날렸다가 그치기를 되풀이했다. 옷도 말릴 겸 바르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서둘렀다.

사하군 카미노 중심 표석과 산 베니또 아치
세아 강의 깐또교


‘사하군의 카미노 중심Sahagun Centro del Camino' 표지석이 보였다.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도록 순례자 지팡이와 발판을 만들어놓았다. 표석 뒤로는 산 베니또 아치Arco de San Benito가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었다. 문득 마을이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따라 나와 세아 강rio Cea 위에 놓인 깐또Puente de Canto 다리를 건넜다. 다섯 개 아치로 된 다리는 로마 시대에 만들어졌다. 다리를 건너자, 카미노는 포플러 숲길이었다. 한동안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카미노 사인을 따라왔으나 깔사다 델 꼬또 마을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변의 갈림길 표지판만 세워져 있었다. 마을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주저 없이 센다를 따라 계속 걸었다. 정처 없는 나그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은 밀밭, 오른쪽은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도로다. 한 시간쯤 지나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마을에 진입했다. 바르에 들어서니 최인규와 김○주가 와 있었다. 어제 숙소에서 만나 아침에 헤어졌다. 그런데도 반갑기는 매한가지였다. 점심을 먹은 후 베르시아노스를 나섰다. 하늘에 먹구름이 한바탕 폭풍을 일으킬 기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우박이 따발총 쏘듯 온몸을 따끔따끔하게 두들기고 지나갔다. 억센 비는 오다가 그치기를 거듭했다. 변화무쌍한 날씨로 오들오들 떨었다. 오늘 카미노는 봄이 아니었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25교구 팀(대한 불교 조계종 본사 탐방) 카톡방에 안부를 전하려고 김상기와 셀카를 찍었다. “비 맞은 생쥐 꼴을 보면 좋아할까 말까.”라면서 낄낄 웃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신이 없어 글만 쓰고 사진은 깜박 잊고 보내지 않았다.


오후 네 시쯤 목적지 엘 부르고 라네로에 도착했다. 비와 우박이 다시 혼을 뺐다. 알베르게를 찾지 못해 빗속을 헤맸다. 김상기가 오스탈에 들어가 물었다. 알고 보니 알베르게를 바로 코앞에 두고 보지 못했다. 도메니코 라피 공립 알베르게는 자원봉사자가 도네이션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배정받은 방이 추웠다. 천장을 타고 술술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다른 방으로 옮겼다. 짐을 풀고 로비에 나갔다. 재스페인 교포 정지은 씨를 만났다. “진주가 고향이고 팔 년 전에 스페인으로 시집왔다.”라면서 “오늘 알베르게 봉사자가 시부모여서 지원 나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매우 친절했다. 우중에 마켓까지 따라와 식품 사는 것을 도와주고 내일 아침에 먹을 하몬 바게트를 직접 만들어주었다. 동포라고 따뜻하게 살펴주는 미세스 정이 정말 고마웠다.

왼쪽 두 번째, 대만 여성을 우리는 미스 타이완이라고 불렀다.
(앉아 있는)미세스 정과 시부모(서 있는 왼쪽 부부)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로비의 벽난로 앞에서 카미노에서 여러 번 만난 타이완 여성과 와인을 마셨다. 대화는 눈치 반, 번역기 반이었지만 흥겨웠다. 우리는 그녀를 미스 타이완이라고 불렀고 그녀는 우리를 오빠라고 불렀다. 31세였고 레스토랑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그녀는 순례가 끝나면 리스본으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도 그곳에 간다고 하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웠다. 취침하러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삶은 달걀 4개를 선물로 주었다. 수다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미세스 정이 우리를 시부모에게 소개했다. 봉사자인 시부모는 연세에 어울리는 온화한 얼굴로 반겨주었다. 웃는 모습에 인자함이 묻어났다. 누군가 “한국 하면 아리랑!”이라고 흥을 돋웠다. 손명락이 미세스 정의 시부모를 위해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불었다. 함께 있던 외국인도 음률에 맞추어 기타를 쳤다. 음악은 순식간에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 어두운 밤, 낯선 하늘 아래 우리의 아리랑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다리橋의 성모 예배당
다리橋의 성모 예배당, 정문인 듯..,
지평선의 오락가락한 기상
몇백 미떠는 됨직한 거대한 살수기
산이 보이지 않는 들판.
농사를 어떻게 짓는 지 궁금하다.
성당만 보다가 처음 만난 교회 종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