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3. 00:27ㆍ산티아고 순례길
2024.12.29.09:03경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를 당하신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국가 애도 기간: ~2025.1.4.)
16 DAY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뿔라리오스
2019.4.5.(금), 비 온 후 흐림.
27.3km(418.6km) / 7시간 5분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의 에스삐리뚜 산또 Espiritu Santo 알베르게는 시설이 넓고 깨끗했다. 하지만 여느 곳과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방이 너무 정숙하고 일찍 소등해 드나들기에 조심스러웠다. 관리자의 순찰 때문인지, 순례자를 배려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 푹신한 매트리스도 거동이 불편했고, 전기꽂이도 입구에만 몇 개 있어 충전하기 어려웠다. 비가 계속 내렸다. 전전반측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다 못해 우의를 입고 나섰다. 바람이 세찼다. 다음 마을까지는 17km 메세타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까미노 프란세스에서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가장 멀다. 가는 동안 마땅한 휴식처도 없다. 여름이라면 식수가 많이 필요하다는데 아직은 걱정 없다.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를 벗어나자, 흙길이 나왔다. 진창길일지 우려됐으나 다행히 괜찮았다. 형형색색의 우의를 펄럭이며 걷는 순례자의 모습들이 초록 밀밭과 대조가 됐다. 비는 시나브로 잠잠해지고,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바람을 안고 가느라 땅바닥을 보면서 구부정하게 걸었다. 어제 10kg 배낭을 메고 백 리 행군한 후유증이 있을까 심려했지만, 군걱정이었다. 보름 만에 믿을 수 없이 튼튼해진 나를 발견했다. 두 발로 체험하는 생생한 느낌, 거기서 얻어지는 작은 희열과 설명할 수 없는 달콤하고 쓸쓸한 행복, 비로소 나도 카미노 일부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순례자들은 메세타는 지루하고 외롭다고 호소한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새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해도 기쁘고 반가워 무료함이 사라졌다.
메세타를 세 시간 반 걸어 정오쯤 깔사디야 데 라 꾸에사Calzadilla de la Cueza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 바르 el Camino는 빈자리가 없을 만큼 순례자가 북적댔다. 비수기인 카미노에서 줄 서서 주문하는 일은 드물었다. 우리는 맥주와 오렌지주스, 보까디요와 또르띠야를 시켜 나눠 먹었다.
마을을 벗어날 즈음 장작 패는 어르신을 보았다. 솜씨 자랑을 하며 포즈를 잡았는데, 막상 사진을 찍으려니 잘 쪼개지 못했다. 민망하게 웃으며 뭐라고 말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평소에 잘하던 일도 남이 보면 실수할 때가 있는 법이다. 어르신도 그랬다. 웃는 표정으로 ‘아디오스’ 인사드리고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마을을 빠져나왔다. 카미노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가다가 폐도로로 이어갔다. 누군가 길바닥에 돌을 모아 화살표를 만들어 두었다. 하트 모양과 십자가도 보였다. 순례자가 길을 잃을까 마음을 다해 만들었으리라. 누군가의 정성을 가슴에 새기며 걸으니 푸근했다. 레디고스Ledigos 마을에 도착해 바르에 들어갔다. 넓은 실내인데도 손님들이 모두 서서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모습이 색달랐다. 우리는 맥주와 카페 콘 레체를 마시며 충분히 쉬었다. 어제보다 오늘 구간은 반도 되지 않았다. 김상기가 “큰일을 치르고 나면 작은 일은 아주 쉽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용기를 북돋우는 한마디였다.
바르를 나와 센다 따라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뿔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마을에 도착했다. 담장 밑으로 노란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났다. 공허한 들판을 다니다가 꽃을 보니 무지 예뻐 보였다. 사진을 찍었다. 가끔 만나는 들꽃은 그냥 막 찍어도 오래 보관하고 싶은 이미지를 남겨준다. 길을 따라가다 흰 바탕에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는 알베르게가 보였다. 템플 기사단 깃발이다. 이 마을은 12세기에 템플 기사단의 근거지였다. 그래서인지 알베르게의 이름이 쟈끄 드 몰레이Jacqued de Molay였다. 템플기사단의 마지막 총 기사단장의 이름이다. 역사의 흔적을 활용해 순례자를 유혹하는 상술 아닐지 망설이다 들어갔다. 일 인당 숙박 10유로, 저녁 10유로, 아침 3유로였다. 다른 곳에 비해 꽤 비싼 편이었다. 와이파이도 약해 인터넷을 활용하기 어려웠다. 낚인 기분이었다. 하지만 저녁 식사인 순례자메뉴가 풍성했다. 특히 하우스 와인을 넉넉히 주었기에 주태백들의 마음속에 엉긴 선입견이 술술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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