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1. 07:59ㆍ여행의 추억
고교 동기들과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충주호 유람선을 타러 가다가 사인암(舍人巖)에 들렀다. 초행이라 대절 버스 기사님이 알려준 길을 따라가니 계곡의 풍광이 아름다웠다. 멀리 사인암으로 보이는 기암이 보였으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작은 사찰 '청련암'에 다다랐다. 五强이 "사인암이라 하더니 청련암이네"라며 우스갯소리로 익살을 부렸다. 삼성각 계단 입구에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우탁의 백발가(탄로가)* 비(碑)가 세워져 있었다. 읽어보니 내용이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오는 백발을 염색으로 눈속임하고 있다. 계류로 내려가는 통로가 사인암 보호를 위해 출입 금지돼 있어 절을 나와 발길을 재촉했다.
옥색 물가에 치솟은 사인암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수직 기암 꼭대기의 아직은 녹음인 나뭇잎이 지고 나면 진짜 그림이 되겠다.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졌고, 밑에는 남조천이 흘러 경관이 빼어났다. 암벽에는 마모돼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긴 글이 여러 줄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 같다'라며 절찬했다고 전해진다.
사인암을 처음 보기도 하고, 명칭도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사인암은 고려 말기 대학자로 경사와 역학, 복서에도 통달한 우탁이 임금을 보필하는 정4품 벼슬인 '사인(舍人)' 재직 시 이곳에서 휴양했다는 사연이 있어,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임재광)가 사인암이라 명명했다.
우탁(1263∼1342) 선생은 <주역>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해 역동 선생(易東先生)으로 불렸다.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밀통하므로 흰옷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에 들어가 극간했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다. -충선왕이 5년 만에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충숙왕은 우탁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다시 벼슬길에 불렀으나 성균제주(成均祭酒)로 소임 하다 치사*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글을 벗 삼아 늙어갔다. 후에 퇴계 이황이 그를 가리켜 ‘백 세의 스승’이라고 칭송했다. 우탁은 성품이 강직해 1392년 고려가 멸망한 후 일체 관직에 오르지 않는 등 새 왕조인 조선조에 협조하지 않아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전하는 시조로 탄로가(歎老歌)인 '한 손에 막대들고'와 '춘산에 눈 녹인 바람' 등 2수가 전한다. (2024.10.20.)
* 우탁의 백발가(탄로가):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들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없다/ 잠시만 빌려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여/ 귀밑에 해 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늙지 말고 다시 젊어져 보려 했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다 되었구나/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여라
*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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