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이틀 관광

2024. 10. 18. 07:56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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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는 깨끗하고 아담했다. 가이드가 대마도는 깡촌 중의 깡촌이라면서, 제주도가 오키나와라면 대마도는 울릉도보다 낙후한 곳이라고 비유했다. 관광객 99%가 한국인이며 일본인은 본토를 다 여행하고 가장 마지막에 찾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일본 본토에서 접근성이 떨어져 잘 알려지지 않은 오지 탓이라고 덧붙였다. 가이드는 우리가(단체 여행객)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가장 번화가 거리에도 병의원 한 곳 보이지 않고, 파출소도 자그맣고 한산해 보였다. 패키지여행 특성상 유료 관광지는 제외되고 무료인 곳만 다녔다. 유일한 유료가 온천 체험이었다.

이즈하라의 조선통신사를 맞이한 장소 표지석

대마도주가 거주했던 <금석성(가네이시성)>은 멀리서도 우뚝한 성문이 눈에 띄었다. 다른 유적 없이 삼 층으로 된 성문만 남았다. 기와는 우리와 닮았으나 문루 형태는 달랐다. 침공자가 오는지 해안을 감시하려고 뒷산 꼭대기 세 곳에도 망루를 설치해 감시했다고 한다.

금석성 성문

금석성을 지나 인근에 <덕혜옹주 봉축비>가 세워져 있었다. 여행객 일동이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렸다. 이 비는 대마도 거주 한국인이 세웠는데 다른 곳에 방치된 것을 옮겨왔다. 덕혜옹주(18세)는 1931.5.8. 대마도 번주 소(宗)씨 가문의 후손인 소 타케유키(23세)와 결혼하고, 6개월 만에 부부 동반으로 대마도를 방문했다. 1931.10.30. 금요일 밤 11시 반, 이즈하라항의 니시하마에 도착해 사흘을 머물고 떠났다.

덕혜옹주 대마도 방문 봉축비

<하치만구 신사>는 일본 국가 수호신인 진구황후(神功皇后)를 모신 곳이었다. 입구의 수령 칠, 팔백 년 된 녹나무 거목이 눈길을 끌었다. 신사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입구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코니시 마리아> 사당이었다. 그녀는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코니시 유키나가의 딸로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결혼했다. 소 요시토시는 장인 코니시 유기나가를 따라 선봉에 섰다가 결국 조선에 패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때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잔당을 척살하는 중이었다. 소 요시토시는 장인이 죽임을 당하자, 부인이었던 코니시 마리아를 내쫓아 위기를 모면했다. 코니시 마리아는 쓸쓸한 일생을 보내다가 사망했다. 남편이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동상>이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약삭빠른 쥐새끼 같은 인간은 늘 있기 마련이다.

코니시 마리아 사당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동상

사무라이 마을에 있는 일본 문학가 <니카라이 토스이 기념관>에 갔다. 생가를 확장해 기념관으로 조성했다. 토스이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부산 왜관에 살면서 엿장수를 따라다니며 한글을 익혔다. 후에 그는 아사히 신문 기자가 돼 춘향전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현재 일본 돈 5,000엔권의 초상화인 근대 여류소설가 <히구치 이치요>는 그를 사랑한 문하생이었다.

니카라이 토스이 기념관 내부
5,000엔권의 근대 문학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 초상화
사무라이 마을, 돌담은 화재가 났을 때 방화벽 역할을 하도록 두텁게 쌓았다.

거대한 붉은 다리 <만제키바시 만관교>는 1900년 일본 해군이 함대의 통로로 사용하려고 인공 운하에 만든 다리다. 현재는 대마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아소만의 아름다운 풍광이 절경이다. 1905년 이곳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를 격멸시켜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를 전쟁의 군신으로 칭송하며, 전투에 승리한 5월 27일을 해군의 날로 정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엄숙히 따지면 이 전투의 결과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돼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부당한 조약을 주선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나는 억울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관교
아소만 일부 전경

만관교를 건너 도로를 따라 10여 분 오르막길을 끝까지 올라가면 <만제키 전망대>다. 이층으로 된 전망대에서 굽어보는 아소만은 가히 절경이다. 아소만 넘어 멀리 운무 속에 대마도 제2봉 백악산(시라타케산)이 흐릿하게 보였다.

만제키 전망대
전망대에서 보이는 아소만 일부 전경

한국 전망소로 가다가 도로와 바다에 인접한 <와타즈미 신사>를 통과했다. 차창으로 바라보니 바다에 도리이 두 개가 반쯤 잠겨 세워져 있고 육지에도 몇 개 보였다. 용궁과 관련 있는 모양이다. 입구에 '한국인은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한글 안내문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야스쿠니 신사로 선입견이 좋지 않은데 꼴불견이었다.

와타즈미 신사 바다속 도리이

대마도 최북단에 있는 <한국 전망소>는 일본에서 한국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한국까지 49.5km 거리다. 팔각정 전망대에서 날씨 좋은 날에는 거제, 부산, 울산이 보인다. 야간에는 부산의 불빛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내부에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 연표가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 전망대 옆에는 1703년(숙종 29년) 사절단으로 보낸 조선 역관 108명이 대마도 입항 직전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전원 죽임을 당하였다. 대마도에서 순사한 이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위령비를 세워놓았다. 전망대 앞 바다에 해상 자위대 기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 전망대
조선 역관 위령비

<미우다 해수욕장>은 대마도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알려져 있다. 맑은 바다와 고운 백사장은 아름다우나 크지 않았다. 해풍이 매우 세찼다. 해변의 나무들도 해풍을 맞아 한쪽으로 후줄근 기울어진 모습이 진풍경을 자아냈다. 여름이면 의외로 한국인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미우다 해수욕장

대마도는 제주도 면적의 38%에 불과하지만, 해안선의 길이는 두 배에 가깝다. 들쑥날쑥한 리아스식 해안이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곳도 멀리 돌아야 갈 수 있었다. 지형도 험하고 왕복 2차선 도로도 아슬아슬한 곳이 많았다. 어떤 곳은 버스 2대가 교행이 안 돼 뒤로 빼줘야 했다. 고불고불한 도로를 따라 산지를 오갔는데 숲은 밀림처럼 우거졌고 삼나무와 편백이 많았다. 바다에는 진주 양식장이 있었다. 관광지마다 트럭 포차가 아름다운 한글로 어서 오시라 인사했다. 일본어를 몰라도 불편한 점이 없었고, 꼭 필요할 때는 그들의 친절로 어려움이 해소됐다. 세상 어느 곳이든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 (2024.10.16~17.)

삼림지구의 단지천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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