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커피숍에서

2024. 9. 3. 08:07일상다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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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네거리 인근의 커피숍에 들어갔다. 점포 앞 인도에 내놓은 '음악이 있는 조용한 곳' 광고판에 이끌려서다. 상호 없이 햇빛 가리개 어닝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KBS가 쓰여 있다. 이것이 상호일까? 실내에는 2인용 탁자 댓 개와 바에 의자가 몇 개 놓였고, 주방 쪽 벽면으로 레코드판이 가득하다. 음반이 없는 빈 곳에 턴테이블과 스피커 두 개가 따로 하나씩 근사하게 놓였다. 좌석이 놓인 두 벽면은 장식하지 않은 채 하얗게 비워두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손님은 나와 친구 둘뿐이고, 혼자 일하고 있는 젊은 남성이 친절하고 사근사근했다. 그가 사장이었다.

벽면의 2,000장 되는 레코드판이 재즈라면서 -클래식은 바흐가 몇 장 있다고도 했다- 레코드판 한 장을 꺼내 소중하게 다루어 턴테이블에 걸었다. 재즈를 잘 감상할 줄 모르지만, 여러 악기의 멋진 연주가 흘러나왔다. 자그마한 스피커 성능이 매우 좋았다. 독일제라고 했다. 커피는 뒷전이 되고 음악 이야기가 전개됐다. 다행히 친구가 상식이 있어 사장과 대화 상대가 됐다. 음반 수집과 음향 기기에 관한 의견도 꽃을 피웠다. 그는 아버지가 클래식을 좋아하므로 자기는 재즈를 택했다고 했다. 그의 솔직함에 숨겨둔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크게 웃었다. 요즘도 레코드판을 이만 장 넘게 소유한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아직도 누군가는 아날로그 시절의 것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사장은 건축을 전공했다는데 재즈를 즐기려고 업소를 연 것으로 짐작됐다. 전공보다 취미를 전문화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당당한 젊은이가 무척 부러웠다.

사족을 덧붙이면, 대구 최초의 음악 감상실은 1946년 향촌동에서 레코드판 500여 장과 축음기 1대로 문을 연 '녹향'이다. 녹향은 장소를 옮겨가면서도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흘러간 추억의 음악다방으로는 한국전쟁 때인 1951년, 1·4 후퇴 당시 서울에서 레코드판 8,000장을 가지고 피난 온 박용찬 선생이 향촌동에서 문을 연 '르네상스 다방'이라고 한다. 문인들과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지만, 1959년 서울로 떠났다. 이제는 음악으로 영업하는 업소들은 대개 레코드판뿐만 아니라 테이프와 CD까지 멀리하고 유튜브를 적극 활용해 실적을 올린다고 들었다. (2024.9.1.)

대구 중구 달성로 71 (대신동)
한 쪽 벽면에 가득한 레코드판은 2,000장.
턴테이블. 월트 디즈니 주제곡이 흐르고 있다.
앞과 뒤, 고급 앨범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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