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2. 04:54ㆍ여행의 추억
계속된 경기 침체로 회사가 어려워져 이번 달부터 휴직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막일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일해온 터라 할 일 없는 것이 따분하다. 은퇴 후 재충전 시기가 있었지만, 쉰 적이 없다. 나이는 실업기(失業期)에 도래했지만 용도폐기 된 느낌이 들어 의기소침하다. 읽던 책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하루 스물네 시간, 직장 하루는 짧았는데 지금은 두 배나 길다니 무슨 조화인가. 이래서 채근담에 ‘일 없을 때는 마음이 어둡기 쉬우니 마땅히 고요한 가운데 밝음을 비추라’라고 했는가. 만사는 마음먹게 달렸으니, 이제부터 하루는 놀고 다음 날은 쉬기로 작정하자.
무료를 달랠 겸 동화사로 차를 몰았다.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금당선원으로 갔다. 선원은 스님들의 수행 공간이다. 일반인 출입을 금지해 스님의 허락을 받아서 들어갔다. 선원의 수마제전 탱화에 반야용선이 그려져 있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는 배다. 어느 날 양산 통도사 극락전 외벽에 그려진 퇴색한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 벽화에 흥미가 끌렸다. 예전에 수마제전 탱화를 건성으로 봤기에 다시 보고 싶었다. 배에 탄 사람은 모두 사자(死者)다. 그림에는 전생을 잊지 못해 뒤돌아보는 사람이 나온다. 통도사에는 평민, 수마제전에는 양반이다. 잘났던 못났던 원(願)과 한(恨)이 많을 우리네 삶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언젠가는 누구나 받아들일 미래를 상상하니 숙연했다.
선원을 나와 공양간으로 갔다. 자유 배식이다. 보살들 뒤로 줄 서서 기다렸다. 신자도 아닌데 공밥을 얻어먹는 것이라 불전함에 천 원을 넣었다. –라면과 비빔밥 두 종류가 있었는데- 노란색 양은 찜통에 담긴 라면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한 그릇 담아 먹고 개수대로 가서 뜨거운 물로 그릇을 씻었다. 보살들은 도반들의 그릇을 한꺼번에 가져와 씻었다. 젊은 한때 즐겨 쓰던 ‘여럿이 함께 가면 힘든 길도 즐거워’라는 명구가 떠올랐다.
통일약사여래대불로 갔다. 대불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1990.10월 착공하여 1992.11월 준공했다. 높이 17m에 좌대를 포함해 총 33m다. 세계 최대 석불이라고 한다. 봉황이 날개를 펼친 형태라고 알려진 팔공산 주 능선을 배경으로 서 있는 대불이 장엄했다. 조성 당시, 불상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했는데 현장을 지나가면서 손바닥 복숭아를 만져보려고 조각상에 올라갔다. 그때는 합체된 상태가 아니었지만, 철없는 짓이었다. 대불을 보면 그 생각이 난다.
대불에서 108계단으로 내려왔다. 계단 개수를 헤아렸는데 조금 모자랐다. 내가 헷갈렸을지도 모르겠다. 계류는 손으로 떠 마시고 싶을 만큼 맑았다. 길에는 인적이 없고 물소리 새소리마저 정적에 묻혔다. 수목과 돌, 풀, 새소리, 산들바람이 모두 절을 받쳐주는 듯했다. 간간이 들리는 드르륵 나무 쪼는 딱따구리 소리조차 염불이었다. 고요한 아취를 자아내는 길을 따라 내려가니 삼거리다. 조선 시대 서거정 선생이 대구십경을 노래한 제7경 동사심승(桐寺尋僧)의 자리임을 알리는 고색창연한 작은 표석이 눈에 띄었다. 아! 내가 마치 선생의 시상(詩想)에 동화한 듯했다. 표석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제7경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층층이 돌길 더듬어 절 찾아가는 걸음
푸른 행건 흰 버선에 검은 등막대 짚었거니
내 흥을 모른들 어떠리 흥은 청산에 있다네
- 동화사 스님 찾아가기, 노산 이은상 역 -
여기서 차를 세워둔 주차장까지 700m 산길. 옛 순례길이 계류를 따라 예스럽게 복원돼 있다. 명경지수 적막강산 길을 홀로 걷는다. 낯선 길이 아니다. 1968년부터 팔공산을 등산했으니 와 본 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계류 옆 널찍한 장소가 나타나면 유년 시절에 A형 텐트를 치고 야영한 자리 같아서 감회에 젖었다. 몽롱한 선경이 끝났다. 땡볕이 쏟아지는 주차장. 마음 현기증이 일어나는 사바세계다. (202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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