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성지 순례 완주

2023. 5. 2. 04:23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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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 순례지 167곳을 완주했다. 순교한 장소나 순교자 무덤이 있는 성지(聖趾) 52곳과 순교자와 연관 있는 장소나 기념 성당이 있는 순교 사적지(殉敎史跡地) 69곳, 신앙 선조들의 삶과 영성이 담긴 순례지(巡禮地) 46곳이다. 교구별로는 서울 25곳, 춘천 15곳, 대전 23곳, 인천 8곳, 수원 14곳, 원주 8곳, 의정부 9곳, 대구 17곳, 부산 8곳, 청주 5곳, 마산 6곳, 안동 7곳, 광주 4곳, 전주 11곳, 제주 7곳이다.
 
천주교 전래 초기 혹독한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신앙 선조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쳤다. 순례의 목적은 이들의 신앙심을 기리고 신앙 유산을 굳건히 이어받는 데 있다. 2022.2.5. 대구대교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을 시작으로 2023.4.13. 성 김대건 신부가 표착한 제주교구의 용수 성지를 마지막으로 완주했다. 직장 관계로 토, 일, 공휴일에, 제주교구는 지리적 관계로 휴가를 내 평일에 다녀왔다. 완주하는 데까지 1년 2개월 정도 걸렸다.
 
완주할 때까지 필수적으로 도움을 준 사물은 ‘내비게이션’이었다. 내비가 없었다면 완주가 가능했을까 의문이 든다. 다음은 '성지순례하는 남자' 유튜브다. 모든 성지를 그 영상물로 예습했다. 운영자 이 베드로 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불교 신자인데도 천주교 성지 순례에 여러 번 따라나서 준 집사람과 친구들(인산, 의호, 자현), 영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윤달 보니파시오에게 감사드린다. 끝으로 성지 책자를 선물해 순례의 기회를 만들어 준 우주정 베라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2년 세례받은 냉담자다. 순례하려고 집을 나설 때는 다짐하고 성지에서는 기도하였지만, 부족한 믿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순교자들의 고귀한 희생에 감동하였으나 나로서는 밤하늘의 별처럼 넘볼 수 없는 경외심만 불러일으켰다. 신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자책이 끊이지 않았다. 나의 고백에 절친인 이윤달 보니파시오 부부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순례를 완주하였건만 아직도 빗물 어린 창밖을 바라보듯 어룽어룽하다. 순례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손때 묻어 헌책이 된 책자는 이제 고이 모셔둔다.
 
* 당신이 태어났을 때는 당신만이 울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은 미소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당신 혼자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김수경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
 
* 전남 영광으로 향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50년 전, 지원 입대하여 전·후반기 14주 신병훈련을 거쳐 처음 배치받아 전역할 때까지 복무했던 곳. 부모님의 슬하를 벗어나 처음으로 나의 젊음이 머물렀던 산 설고 물선 낯선 땅. 군 복무를 했던 바닷가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세월이 유구하여 산천이 변했다. 군사 시설은 어제의 일을 숨긴 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바다만 그때 그대로다. 방둑에 서 바다를 바라보니 타임머신을 탄 듯 그때 그 시절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영광 순교자 기념 성당)
 
* 천주교 성지 순례는 대부분 묘를 참배하는 것이다. 박해 당시 체포되어 신앙을 지키고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묘이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공포를 견뎌낸 그들의 기개에 감동한다. 배교하겠다는 말 한마디에 모두 살 수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마원 성지)
 
*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은 1784년. 이보다 30여 년 전 홍유한(1726~1785)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신앙생활을 한 첫 인물이다. (홍유한 고택지)
 
* 땀 흘려 산에 올라 경치 좋은 곳에서 절을 만나면 감동했다. 천주교 성지도 그런 곳이 적지 않다. 한적하고 깊은 골짝을 돌고 돌아 산기슭에 자리 잡은 성지는 아름답다. 어떤 곳은 스님이 암자를 양보하기도 했지만, 과거, 형장(刑場)으로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것을 짐작하면 아름다운 풍경에 앞서 마음이 먼저 숙연해진다. (나바위 성지)
 
* 제사는 우리 민족 핵심 전통의 하나다. 조상을 기리는 목적도 있지만, 친인척과의 친화, 결속 의미도 깊다. 조선 시대 천주교회는 미신적 요소가 있는 이유로 제사를 금지했다. 이에 따른 실천이 박해를 일으켰다. 불효 죄로 체포된 신자가 참수되어 첫 순교자가 되었다. (진산 성지)
 
* 구불구불 골을 따라 낡은 도로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겠다. 수리치골에 들어서니 고개를 돌려 살피지 않아도 갖가지 야생화가 소담스레 피었다. 1846년 프랑스 신부들이 이 외진 곳에서 성모 성심회를 조직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1984년, 성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이 한국을 방문해 수리치골의 옛일을 언급하셨다. 그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곳은 한국 최초의 성모 성지로 탈바꿈되었다. 중요한 사람의 말씀은 아름다운 결과를 낳는다. (수리치골 성모 성지)
 
*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는 한국교회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다. 박물관에서 그의 행적과 꼼꼼한 필체를 보고 감명받았다. 그의 선종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펐다.
산속의 무명 순교자 묘에 들렀다. 하얀 꽃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이었다. 한들거리는 꽃 속에 하얀 십자가가 듬성듬성 보였다. 엘비라 마디간 영화에서 흐르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 2악장 안단테의 서정미가 전신을 휘감았다. 별일이었다. (베티 성지)
 
* 도앙골 성지에서 삽티 성지까지는 내비로 8km인데, 질러갈 수 있는 안내판(산길, 3.5km)을 발견하고 산길로 차를 몰았다. 편도 1차선 아스팔트 포장은 시공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꼬불꼬불한 도로는 곧 비포장으로 변했다. 노폭이 좁아 차를 돌릴 수 없었다. 산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바닥 긁히는 소리, 무엇엔가 부딪혀 덜컹거리는 소음, 쓰러진 잡목을 치울 때는 한숨만 나왔다. 산길 도로는 숲이 우거져 어둑했고 구불구불 경사가 심했다. 빽빽한 잎새 사이로 햇살이 쏟아질 땐 순간 시야가 흐트러지기도 하고 팬 땅은 고인 빗물로 미끄러웠다. 황당한 모험이었다. (도앙골 성지에서 삽티 성지로 가면서)
 
* 강원도 지방을 통치했던 강원 감영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띈 것은 일렬로 도열한 선정비였다. 모두 17기. 수많은 관찰사와 목사들의 선정비가 세워졌으나 대부분 없어졌고 남아 있는 비석들을 한곳에 모은 것들이다. 감영은 조선시대 행정, 사법의 중심지였지만, 천주교인들에게는 죽임을 당하는 순교지였다. 선정비를 보니 선정과 악정의 차이가 무엇인지 의문이 생긴다. (강원 감영)
 
* 남종삼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승지까지 올랐다, 대원군에게 프랑스 주교를 통해 서구 열강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고 상소하여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정치적 입지가 불리해진 대원군은 정권 유지를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기로 결심했다. 병인박해(1866)가 시작되자 남종삼이 묘재에서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아버지 남상교는 공주 감옥에서, 처 이조이는 창녕에서 순교하고 14살 큰아들 명희는 전주 초록바위 앞 전주천에 수장되었다. 막내아들 규희와 두 딸 데레사와 막달레나는 노비가 되었다. 유택에는 무더운 날씨에도 쓸쓸한 바람이 가슴을 파고든다. (성 남종삼 요한,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유택지)
 
* EBS 방송에서 언어학자 김시덕 박사의 ‘권력자와 종교의 충돌’ 강의를 시청했다. 김 박사는 조선시대 가톨릭 순교자를 분석한 결과, ‘권력자에 대한 저항’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 강의를 수박 겉핥기로 들었다고 해도 순교에 대해 마음속 의문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가톨릭은 모든 사람의 평등을 추구하는데 조선시대는 양반, 천민, 남성, 여성, 적자, 서자 등 사회적 불평등 요인이 너무 많았다. (다락골 성지)
 
* 비가 올 듯 말 듯 해 망설이다 집을 나섰다. 중앙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비가 오락가락했다. 그런데도 원주부터는 하늘이 맑고 비가 뿌린 흔적이 없었다. 하지만 성당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수해 흔적이 역력했다. 돌아오는 길에 단양 부근에서 국지성 호우를 만나 모든 차들이 벌벌 기는 운전을 해야만 했다. 일시적이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수재민들의 답답한 심정을 백분의 일이라도 알 것 같다. (풍수원 성당)
 
* 가을이 물든 영남알프스는 신비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간월재 서쪽 왕방골 협곡 사이에 있는 죽림굴(대재 공소)은 박해 시대 공소로 유서 깊은 곳이었다. 100여 명의 신자가 은신했던 좁은 굴은 깜깜했다. 암흑 속에서 믿음의 불빛 하나로 버텨냈을 신자들을 생각하니 전율이 일었다. 동굴보다 더 깊고 넓었을 신심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죽림굴)
 
* 진정한 순례자라면 하루 한두 곳이 적당하지만 나름의 목표 기간을 설정했기에 자꾸 셈을 한다. 순례 정신을 훼손하는 것 아닌지 조마조마하다. 그럴 때면 항상 내 편이 돼 주는 친구 보니파시오는 "하느님께서 통이 큰 하느님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살피고, 용서하시는 분입니다."라고 위무 어린 독려를 해준다. (성체 순례 성지)
 
* 서울 지역은 천주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니만큼 신자들의 희생이 실로 컸다. 순례 갈 때는 약간의 학습을 하고 간다. 습득한 정보와 현장이 개인적 상상과 다를 때가 있다. 세월이 흘렀고 도시가 진전하니 당연한 현상이다. 특히 순교자의 시신 794위가 '광희문'을 통해 성밖에 내버려졌다. 광희문을 시구문(屍口門)이라 일컫는 이유다. 엄혹한 시대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그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할 수 없다. 뜻있는 사람의 심상에는 여전히 그려진다. (광희문 성지)
 
* 추자도는 접근이 쉽지 않았다. 황경한 묘가 새로이 단장되었지만, 바다를 향해 앉은 묘는 변함없이 쓸쓸하다. 갯바위에 피붙이를 두고 떠나간 어미 심정 또한 오죽했을까. 눈물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 아픔과 눈물이 상상되었다. (황경한의 묘)
 
* 성 김대건 신부가 중국 상해를 출발해 서해로 귀국하려다 표착한 제주 용수리 해안. 그곳의 용수 성지에서 순례를 마쳤다. 복원한 ‘라파엘호’가 수리 중이어서 관계자에게 부탁해 ‘라파엘호’에 올랐다. 신부님 일행의 만분지 일의 영성이 깃들기를 기도했다. 무사히 성지 순례를 마친데 깊은 감사 마음을 가졌다. (용수 성지)

홀로 다닌 순례길을 돌아보면 신앙 선조들의 행적을 읽어서 알고 상상하여 느낄 수 있었으나 나를 뒤돌아보기는 어려웠다. 고독했던 여정 탓인지 채우지 못한 영성의 목마름인지 알 수 없는 회한에 가슴이 먹먹하다. 보이는 것보다 더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한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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