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1. 13:52ㆍ여행의 추억
동호회 번개 날에 하필 아침부터 비가 왔다. 단비인가, 번개 날짜를 연기하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후 한 시, 추적추적 비가 오는데 우산을 받쳐 들고 나오신 선생님들. 차량 세 대로 나누어 타고 영천으로 향했다.
먼저,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 이당(李唐)의 묘>에 갔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 묘와 영천최씨 사이에 얽힌 설화를 회장님에게 들었다.
1368년(공민왕 17) 이집이 신돈을 탄핵하려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아버지(唐)와 함께 경상도 영천으로 도망쳐와 친구인 최원도(전직 사간)의 집 다락에 숨어 살았다. 최원도의 몸종 제비가 이 사실을 알고 고민 끝에 상전의 비밀을 지키려고 자결하였다. 이듬해 이집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최원도는 자신이 묻히고자 잡아 놓은 어머니(영천이씨) 산소 아래 장사지냈다. 광주이씨는 이곳에 시조를 모신 음덕 때문인지 조선중기까지 대문중으로 우뚝섰다. 현재 묘역 일대는 광주이씨 소유로 되었다. 지금도 시조 시제를 지내면서 최원도 어머니 영천이씨에게도 제물을 올리고 몸종 제비한테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몸종이 양반의 절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당 묘를 둘러보는 동안 비가 잦아졌다. 간식으로 입담을 즐기며 <도계서원과 노계문학관>으로 향했다.
노계(蘆溪)는 박인로(1561~1642)의 호이다. 그는 영천에서 태어나 82세에 타계했다.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와 함께 한국가사문학의 3대 시성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이 되었다가 종군하였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노계문학관은 도계서원 아래 건립되어 있었다. 영상실에서 노계의 작품 세계를 입체 화면으로 볼 수 있어 실감이 났다. 그림과 글자로 하는 소개보다 눈맛을 높이는데 세심한 정성을 들인 느낌을 받았다.
도계서원은 노계가 타계한 지 65년 뒤 1707년(숙종 33) 유생들의 뜻을 모아 도계사(道溪社)를 창건하였다. 이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현재 서원은 자리를 옮겨 복원한 것이다. 입구의 원두평 저수지는 가뭄으로 악취가 심했다.
이어서 <옥간정>(경북 유형문화재)과 <모고헌>(경북 유형문화재)을 찾아갔으나 문이 잠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담장 밖에서 기웃거렸으나 자세히 관찰할 수 없었다. 안내판을 읽고 참고 하였다. 건물 아래 하천을 따라 숲이 울창해 그늘이 그윽했다.
차를 돌려 도착한 곳은 100년이 넘는 역사가 깊은 <자천교회>.
1898년경 권헌중 장로의 노력으로 가정교회로 예배를 드리다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남녀 좌석을 구분했던 한옥 예배당은 교회사와 건축사,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예배당 문이 잠겨 내부는 볼 수 없었다. 경북 문화재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우중임에도, 느지막이 출발해 다녀온 179km 여정. 대단히 유익하고 즐거웠다. 회장님이 한턱을 쓴 돌메기 매운탕 집은 흥미로운 장식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음식 맛도 좋았다.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느낌이 든 이번 번개 모임. 오롯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다. (202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