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악동 고분군과 김유신 묘

2025. 1. 12. 00:46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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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 광장에서 모형 무덤을 봤다. 무덤은 경주를 상징하는 대표적 조형물이다. 경주에는 신라 56왕의 37기 왕릉과 990여 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관광에 나서면 발길이 자연스레 고분으로 향했다. 나그네로서 특별한 상식이 없어도 VCR과 안내판만 참고해도 별 무리가 없었다. 고대 왕들의 무덤인 대릉원 일원은 여러 번 들렀지만, 6세기 이후 왕의 묘역인 <서악동 고분군>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숙소에서 서악동 가는 길에 우연히 김유신 묘 도로 표지판을 만나 먼저 갔다. 삼국통일의 일등 공신인 김유신 장군은 죽은 뒤에 흥무대왕으로 추봉(追封, 죽은 뒤 관위를 내림)됐다. 묘 관리는 물론 여느 왕들의 능보다 잘 가꾸어져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무덤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이후 현재 상태로 보강됐을 것이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김유신(595~673) 묘 입구(흥무문).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 후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다. 후에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와 혈연관계를 맺어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며, 당나라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후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묘는 송화산 옥녀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 위에 있다. 무덤 둘레의 둘레돌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긴 버팀돌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 서쪽과 동쪽에 각각 조선 숙종 36년(1710)과 1934년에 세운 비석이 있다. (현지 안내판 요약)


서악동 고분군 입구에서 바라본 능역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자리 잡은 <서악동 고분군>에는 4기의 왕릉과 주변에 고분이 산재했다. 제일 위 진흥왕릉 아래 진지왕릉이 있고, 조금 아래에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이 있다. 능선의 끝부분에는 무열왕릉과 -지금은 도로가 뚫려 떨어져 있지만- 둘째 아들 김인문과 9세손인 김양의 묘가 있었다.
경주에 왕릉이 많지만, 무덤의 규모와 관리 측면에서 각각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진흥왕은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공적에 비해 능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장례문화의 시대적 차이일까? 후대의 평가는 교과서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진지왕은 재위 4년 만에 화백회의에서 폐위가 결정돼 물러났다. 안내판에는 백제군을 격퇴했다고 돼 있으나 사실은 공격당하거나 패했다. 이 때문에 폐위된 걸까? 요즘 정치판을 돌아보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성왕도 재위 기간 중 반란과 모반이 끊이지 않았다. 장보고의 딸을 후비로 삼으려다가 신하들 반대로 중지되자 이듬해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자객 염장에게 피살됐으나 이후에도 벼슬아치들의 모반이 있었다. 헌안왕도 재위 5년이라지만, 3년 4개월에 불과해 뚜렷한 치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어찌 된 영문인지 헌안왕릉 바로 옆에 조선시대의 통훈대부(당하관, 현재 1~2급) 황 선생의 무덤이 있었다. 봉분의 크기는 왕릉에 비할 바 없지만, 석상 등 장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왕 묘역에 무덤을 썼으니 권문세도였었나보다. 역사는 말없이 흘러갈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서악동 고분군 산불 감시원에게 갯보산 인근의 옛 고려장(高麗葬) 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으나 현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2025.1.6.)


진흥왕릉: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을 모신 곳. 진흥왕은 제23대 왕인 법흥왕이 아들 없이 세상을 뜨자 조카로서 왕위에 올라 37년간 재위하였다. 즉위 당시 나이가 7살에 불과하여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진흥왕은 대가야를 병합하고 한강 유역과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國史)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였다. 능 주변에 자연석으로 만든 둘레돌의 일부가 드러나 있다. (현지 안내판 요약)


진지왕릉: 신라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이 묻힌 곳.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태자인 형이 먼저 죽어서 왕위를 이었다. 즉위 후 거칠부에게 국정을 맡겼고, 진흥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을 쌓았다. 또한 백제군을 격퇴하고 중국 진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등의 치적을 쌓았으나 재위 4년 만에 화백회의에서 폐위가 결정되어 왕위에서 물러났다. 능은 진흥왕릉과 가까이 있다. 봉분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둘레돌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드러나 있다. (현지 안내판 요약)


문성왕릉: 신라 제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이 묻힌 곳. 문성왕은 신무왕의 태자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에 귀족 세력의 도전과 연이어 발생한 난(亂)으로 왕권 유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 불교 진흥에 관십을 가졌다. 신병이 위중해지자 작은아버지인 의정에게 왕위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능은 선도산에서 동쪽으로 뻘어 내린 구릉 말단부에 헌안왕릉과 함께 있다. (현지 안내판 요약)


헌안왕릉: 신라 제47대 헌안왕(재위 857~861)을 모신 곳. 헌안왕은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헌안왕은 불교를 통하여 지방 세력의 불만을 완화하려는 정책을 펼쳤으며,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재위 5년 봄에 병으로 위독하자 신하들에게 사위 응렴이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 능은 자연석으로 만든 둘레돌의 일부가 표면에 드러나 있다. (현지 안내판 요약)
(왼쪽) 조선시대 통훈대부 황 선생 묘, (오른쪽) 헌안왕릉은 봉분만 있다. 장례문화 변화로 조선시대에는 석물을 장식한 듯.


서악동 고분군 배치도
무열왕릉 입구(건무문)
무열왕릉: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의 능은 선도산 동쪽 능선의 끝부분에 자리한 큰 무덤 5기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손자이다. 진덕 여왕의 뒤를 이어 진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치고 내정 개혁을 주도하여 김유신과 함께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으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660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한 다음해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의 시호(諡號, 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는 무열이고 묘호(廟號, 임금이 서거한 뒤 종묘에 배향할 때 불이는 임금의 호)는 태종이다. (현지 안내판 요약)
태종무열왕릉비(국보). 통일신라 최초의 화강석 비석이다. 비신은 사라지고 받침돌인 돌거북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다. 머릿돌 가운데에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둘째 아들이자 명필인 김인문이 썼다고 전해진다.
건무문을 들어서면 태종무열왕릉비 비각이 있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김인문과 김양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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