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 광장에서 모형 무덤을 봤다. 무덤은 경주를 상징하는 대표적 조형물이다. 경주에는 신라 56왕의 37기 왕릉과 990여 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관광에 나서면 발길이 자연스레 고분으로 향했다. 나그네로서 특별한 상식이 없어도 VCR과 안내판만 참고해도 별 무리가 없었다. 고대 왕들의 무덤인 대릉원 일원은 여러 번 들렀지만, 6세기 이후 왕의 묘역인 <서악동 고분군>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숙소에서 서악동 가는 길에 우연히 김유신 묘 도로 표지판을 만나 먼저 갔다. 삼국통일의 일등 공신인 김유신 장군은 죽은 뒤에 흥무대왕으로 추봉(追封, 죽은 뒤 관위를 내림)됐다. 묘 관리는 물론 여느 왕들의 능보다 잘 가꾸어져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무덤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이후 현재 상태로 보강됐을 것이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자리 잡은 <서악동 고분군>에는 4기의 왕릉과 주변에 고분이 산재했다. 제일 위 진흥왕릉 아래 진지왕릉이 있고, 조금 아래에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이 있다. 능선의 끝부분에는 무열왕릉과 -지금은 도로가 뚫려 떨어져 있지만- 둘째 아들 김인문과 9세손인 김양의 묘가 있었다. 경주에 왕릉이 많지만, 무덤의 규모와 관리 측면에서 각각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진흥왕은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공적에 비해 능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장례문화의 시대적 차이일까? 후대의 평가는 교과서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진지왕은 재위 4년 만에 화백회의에서 폐위가 결정돼 물러났다. 안내판에는 백제군을 격퇴했다고 돼 있으나 사실은 공격당하거나 패했다. 이 때문에 폐위된 걸까? 요즘 정치판을 돌아보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성왕도 재위 기간 중 반란과 모반이 끊이지 않았다. 장보고의 딸을 후비로 삼으려다가 신하들 반대로 중지되자 이듬해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자객 염장에게 피살됐으나 이후에도 벼슬아치들의 모반이 있었다. 헌안왕도 재위 5년이라지만, 3년 4개월에 불과해 뚜렷한 치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어찌 된 영문인지 헌안왕릉 바로 옆에 조선시대의 통훈대부(당하관, 현재 1~2급) 황 선생의 무덤이 있었다. 봉분의 크기는 왕릉에 비할 바 없지만, 석상 등 장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왕 묘역에 무덤을 썼으니 권문세도였었나보다. 역사는 말없이 흘러갈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서악동 고분군 산불 감시원에게 갯보산 인근의 옛 고려장(高麗葬) 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으나 현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202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