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기억

2024. 8. 17. 09:47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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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올해도 라면 수출이 효자 식품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지구촌에 라면 전승 시대가 도래하나 보다. 우리나라 라면은 면과 스프를 같이 물에 넣어 끓여내기만 하면 되는 인스턴트 식품이다. 라면 한 개는 종류별로 차이가 나지만 보통 30~60cm 길이의 면발이 75~100가닥쯤 된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건강의 적, 질 낮은 먹거리라고 치부하지만 1958년 라면을 처음 개발한 안도 모모후쿠는 매일 한 개 이상 라면을 먹었지만 96세까지 장수했다. 지금은 인기 식품으로, 우주정거장으로 가지고 가는 우주인 라면까지 나왔다.

한국에 라면이 처음 등장한 해는 1963년이었다. 그해 가을,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다가 무료로 나누어 주는 판촉물 라면을 한 개 받았다. 한가운데에 종이띠로 말린 마른국수와 달리 비닐봉지에 포장된 네모난 국수라니 신기했다. 공것이건만 낯설어 받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상표는 생각나지 않지만, 겉봉이 파란색이었다는 것이 어렴풋하다. 하룻밤 만지작거리다 다음 날 끓여 먹은 게 내가 먹은 첫 라면이었다. 밍밍한 것이 별맛이 없었다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다. 훈련병에게 토요일마다 점심때 라면을 배식했는데, 라면과 스프를 -기간병들이 빼돌렸는지- 양을 많게 만들려고 물에 팅팅 불려 면이 부풀었고, 스프를 모자라게 넣어 허옇고 멀건, 간이 맞지 않은 국물도 먹기에 거북했다. 불만이 많았지만, 당시는 불평은커녕 쪽도 못 쓰는 어두운 시절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받아 서해안 초소에 복무하게 됐다. 주 임무가 야간 경계였는데 매일 삼양 라면 한 개가 지급됐다. 라면은 순찰조 임무를 마친 후 새벽에 먹게 돼 있었다. 초소 안에서 항고*에 끓인 후 밖으로 들고나와 밤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맛은 꿀맛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부러워 내려다보고, 바다는 라면을 나누어 달라고 하얀 거품을 토해 내며 아우성을 질러댔을까. 전역할 때까지 매일 한 개씩 먹었는데, 싫증 날 때는 봉지째 손으로 두드리고 문질러 면을 최대한 잘게 부순 후 끓여서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했다. 그것은 별미였다. 초병들에게는 라면은 사랑 그 자체였다. 그때의 환상의 맛이 잊히지 않는다.
전역하고 몇 달이 지나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삼양 라면의 '공업용 우지 사건'이 터졌다. 수입산 공업용 소뼈를 갈아 스프 재료로 사용한 것이었다. 전국의 매스컴에 대서특필돼 국민의 분노를 샀다. 나도 매일 라면을 먹어왔기에 크게 실망했다. 후에 알고 보니 외국에서는 소뼈를 먹지 않아 형식상 공업용으로 수출한다는 것이었지만, 뒤늦은 해명은 효과가 반감하기 마련이었다.

풋풋한 젊은 시절에는 산행을 제일 좋아했다. 일요일마다 산에 올라 직장에서 쌓인 한 주일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산행하면서 점심은 보통 김밥과 라면이었다. 요즘과 달리 산에서 불을 피워 조리할 수 있었다. 특히 겨울 산에서 버너로 끓여 먹는 라면은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 열리는 보약 같았다. 등산 필수품 이상의 역할을 했다. 언제부턴가 산에서 취사 행위가 금지돼 생이별하였지만, 그때의 행복감이 지금도 그리울 지경이다.

직장을 은퇴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숙소인 알베르게*에 숙박하면서 아침 식사는 언제나 현지 컵라면으로 때웠다. 우연히 컵라면을 먹어본 적은 있지만 아침 끼니로 한 달 내내 먹기는 처음이었다. 푹 퍼진 라면을 좋아하는데 컵라면은 그렇지 않았다. 온수를 조금이라도 뜨겁게 유지하려고 컵라면 뚜껑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고 기다렸지만, 꼬들꼬들한 면이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먹고 난 후 그릇 씻을 일이 없고 컵만 버리면 되었기에 정말 간단하고 편리했다. 그럼에도 컵라면에는 아직 정을 붙이지 못했다.

요즘은 밤잠 걱정 없는 백수 생활로 넷플릭스를 자주 본다. 심야에 영화를 보면 때로는 출출한 시장기를 느낀다. 컵라면이 간편하지만,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라면을 끓인다. 내 방식은, 국물이 거의 없도록 냄비에 물을 조금 적게 붓고 라면을 반으로 뚝 잘라 스프와 같이 넣어 불을 켠다. 손이 한 번만 가는 일체형 스타일이다. 푹 익도록 둔다. 꼬부랑 면이 펴지면 식초를 몇 방울 떨어트린 후 젓가락으로 면을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놓았다가 몇 회 반복하고 불을 끈다. 국물이 자작한 상태다. 계란이나 김치 같은 것을 일절 가미하지 않는다. 라면 그대로만 즐긴다. 짭조름한 맛을 좋아하는 내 입에 딱 맞다. 집사람이 끓여 주는 라면은 계란, 파, 물만두 등을 가미한다. 국물도 적당히 있다. 그것도 맛있게 잘 먹는다. 라면은 언제라도 에브리씽 오케이다.

* 항고 :  밥을 지을 수 있는 반합(飯盒). 군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알루미늄 밥그릇.
* 알베르게(Albergue) :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의 마을에 있는 순례자 숙소. 예약없이 선착순으로 이용하며 비용이 저렴하다.


끓인 라면의 꼬부랑 면이 거의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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