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을 먹으며

2024. 7. 24. 07:21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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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을 하나 샀다. 어찌나 큰지 집사람과 둘이 먹는데, 열흘 정도 걸렸다. 더울 때는 수박만큼 시원한 과일도 없겠다 싶어 새로 하나 샀다. 요즘 수박은 옛날보다 두 배는 더 크고 무겁다. 접이식 카트에 담으니 한가득하다. 작게 잘라 타파 통에 넣어 두었다가 냉장고에서 꺼내 먹으니 어릴 때의 아스라한 추억이 몰려왔다.
감추어 두었던 보물 창고를 열어본다. 무더운 여름밤, 아버지가 수박을 하나 사 오면, 나는 심부름한다. 대부분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어서 얼음집으로 달려가 작은 얼음덩어리를 사 오는 것이다. 사 온 얼음은 커다란 다라이 속에 넣어 놓고 못을 대 망치로 살살 두드리면 얼음이 잘게 깨졌다. 거기에다 수박의 빨간 살을 숟가락으로 파내어 합치고 약간의 물을 붓고 사카린을 태우면 수박화채가 만들어졌다.
잠시 뒤 화채가 시원해지면 가족들이 나누어 먹었다. 밥그릇에 화채를 덜어 -조금이라도 오래 즐기려고- 천천히 먹다 보면 그릇에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 손이 시리기까지 했다. 다 먹고 나면 더 먹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무더위가 날아간 자리는 열락이 찾아와 메꾸었다. 그 순간만은 수박 하나에 일곱 식구가 모두 행복했다.
어머니는 파낸 수박을 버리지 않고, 껍질을 깎아낸 후 하얀 속살을 채로 썬 다음 조물조물 무쳐 다음 날 아침 나물 반찬으로 내놨다. 하룻밤이 지나도 시원한 맛이 남아 있어 입맛이 좋았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때의 환상적인 수박 맛과 그날의 행복감은 잊을 수 없다. 고생했던 추억도 지나고 보면 감미로운가 보다. 옛 추억을 소환하면 지금 풍족이 과분하게 느껴진다. 아버지, 어머니 그립습니다. (2024.7.23.)




과거에는 규모가 작았지만, 여름에만 장사하는 이런 모양의 얼음집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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