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해물회의 생우럭 지리탕

2024. 2. 21. 22:50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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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존경하는 선생님과 느지막이 수성못을 거닐다가 인근의 <창해물회> 식당에 갔다. 80년대 시내에서 영업할 때부터 넓고 큰 바다라는 뜻의 창해(滄海)라는 상호에 끌려 자주 다녔다. 현재 장소로 이전한 지 까마득하지만, 아직 가끔 들린다. 오늘 우수(雨水)는 겨울을 마무리하고 봄이 시작되는 절기지만 옷깃을 여미는 찬바람 탓에 뜨거운 '생우럭 지리탕'을 주문했다. 매운탕은 얼큰하게 끓이는 반면 지리는 말갛게 끓이는 탕이다. 우럭의 정식 명칭은 조피볼락이지만, 생소해하는 사람이 많아 오히려 사투리 우럭이 친숙하다.

홀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데 벽면의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새 떼처럼 보이는 흘려 쓴 서체가 초서인 듯 행서인 듯한 붓글씨가 멋졌다. 선생님이 불접빈객거후회(不接賓客去後悔: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면 간 뒤에 뉘우친다)라고 읽어주셨다. 지역에서 유명하신 동보 민영보 선생님이 을미년(2015)에 창해 식당의 만사여의 형통을 기원하면서 써주신 주자십회훈의 한 구절이었다. 감탄하며 의견을 나누는 동안 뚝배기의 바글바글 끓는 탕이 나왔다.

뚝배기에서 나는 뜨거운 김과 고명으로 얹은 깻잎 향이 코끝에 전해졌다. 향을 음미하느라 슬그머니 눈이 감겼다. 우럭과 무, 파 등 건더기가 하얀 국물을 덮었다. 건더기가 부족한 맑은탕은 보기에 멀건 데 비해 정성껏 요리한 느낌을 받았다. 밥그릇 뚜껑도 열지 않은 채 숟가락으로 국물부터 몇 술 떴다. 입안에서는 구수하고 가슴 속으로는 시원했다. 살 바탕이 푸짐한 우럭살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하얀 육질이 담백하고 구수했다. 단단한 살의 씹히는 맛도 깔끔했다. 맛을 즐기려고 내 딴에는 천천히 먹었는데, 선생님은 따라 먹느라 땀이 나셨다. 그만큼 내게는 맛의 유혹이 컸나 보다. 창해물회의 생우럭지리탕은 푹 고아낸 곰탕같이 깊게 우러나온 국물 맛이 구수했고 황태의 담백하고 시원한 맛 같기도 해 너무 신기했다. 생우럭탕의 진정한 맛을 느낀 저녁이었다. 맛있는 좋은 음식을 만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오늘도 그랬다. (2024.2.19.)

수성구 무학로 107 (두산동)
생우럭 지리탕(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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