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땅콩

2022. 9. 23. 08:40일상다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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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는 화원역 지하철 입구. 할머니가 흙 묻은 마른 땅콩을 팔고 있었다. 골판지에 삐뚤삐뚤한 글씨체로 ‘1되 8,000원’이라는 가격을 써 놓았다. 옆에는 근래 보기드문 사각 되가 놓여있다. 황토에서 재배한 듯 누런 흙이 묻은 땅콩은 크고 토실했다. 잘 크고 있는 손자 녀석들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온다고 하니 잘 됐다 싶었다. 손자가 둘이다. 길을 가다 이런 먹거리를 보면 녀석들을 떠올리니 나도 어쩔 수 없는 할아버지인가 보다. 물건이 다 팔렸는지 인도에 깔아놓은 낡은 천바닥 위에는 조금밖에 쌓여있지 않다. 떨이로 팔려는지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통 사정한다.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카드 됩니까’라고 하니 멋쩍은 얼굴로 ‘안 됩니다’라면서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주머니가 떠났다. 어스름이 깔리려 했다. 나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려다 남은 그 땅콩을 만 원어치 샀다. 두 손바닥으로 덤을 얹어 주었다. 검정비닐에 담아서 돌아서는데 괜히 서글퍼졌다.

할머니를 일찍이 여의어 얼굴조차 모른다. 살아생전 어머니를 할머니 모습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남들이 우리 어머니를 할머니라 불렀지만 내 눈엔 여전히 젊은 엄마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수더분한 외모의 할머니를 보면 마치 어머니 같아 보일 때가 많다. 땅콩 파는 할머니도 그렇게 보인다.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말이 있다. 집에 오니 은근히 마음이 바뀐다. 잠이 안 올 때 까먹을까 싶어 집사람에게 삶자고 했다. 비닐봉지를 풀어보고 땅콩이 실하다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삶으면 쉴 수 있으니 말려서 볶자고 말한다. 오늘 아침, 볕이 들어오는 베란다에 신문지를 펴고 땅콩을 늘었다. 손자들의 귀여운 얼굴이 쓱 지나간다.


레고 놀이하는 개구쟁이 두 손자 / 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