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침회 식당의 여주인

2023. 10. 20. 06:54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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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을 따라 가오리무침회를 잘한다는 식당에 점심 먹으러 갔다. 선팅이 햇빛에 바래 얼른 보니 장사하는 집인지 모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앉은뱅이 테이블 여러 개가, 창가로는 고추 포대와 여기저기 잡동사니가 쌓였다. 탁자가 식당 상징이었다. 손님은 없었다. 여주인이 지인을 반갑게 아는 체했다. "손님, 다 가신 모양이죠?"라고 지인이 수인사했다. 이 지역에서만 영업한 지 십구 년 됐고 음식 인심이 남달라 인근에서는 알아서 찾아오는 집이었다.

무침회를 주문했다. 허리가 구부정한 여사장이 주방에 들어가더니 "맵게 하까?" 소리쳤다. 주방 쪽으로 보면서 "보통 요."라고 답했다. 요즘은 허리 굽은 사람이 드문데 딱해 보였다. 소짜 무침회를 접시에 봉긋하게 담아 양이 많아 보였다. 투박한 겉보기와 달리 입맛이 맞았다. 숙성한 가오리에 고루 버무려진 양념 맛이 매운 듯 달았다. 용 가는 데 구름 가고 범 가는 데 바람 간다. 무침회에는 소주가 있어야 했다. 맛있게 먹기 때문일까, 멀찍이 앉아있던 여주인이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우리가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동안 옆에 앉아 유별나게 고생한 어제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는 일어서면 허리가 구부정한데, 앉은 자세는 스님처럼 꼿꼿했다. 일흔셋이라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도 고와 보였다. 열아홉에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은 총각에게 시집가 슬하에 이남일녀를 두었다. 가련하게 그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매 맞으며 살았다고 했다. 순하디순한 양반인데 술만 마시면 주먹질 해댔다. 80년대 초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한 달이 지나서 나타났다. 빡빡 깎은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돌아왔는데 삼청교육대에 갔다 왔다면서, '니가 신고해 잡혀갔다'라며 초주검이 되도록 맞았다고 말했다. 원통해선지 목이 메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그 후 매를 피해 막내를 데리고 집을 나와 돼지국밥집 일을 거들면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느 날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친척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 6개월 동안 병간호했으나 ○○병원에서 죽었다. 남편이 죽고 난 후 전상자(戰傷者)에게 국가유공자 지원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말할 때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전에 알았다 한들 어쩌랴. 남편은 정부 돈 덕에 매일 술 마시고 주먹을 휘둘렀고, 아내는 정부 돈 탓에 매일 맞고 산 셈이다. 남편이 죽은 후 제사를 지내다가 하도 억울한 심정이 들어 자녀들과 의논해 이제는 지내지 않는다고도 했다.
환경이 그러다 보니 제일 잘못한 일은 아이들 공부를 못 시킨 거라고 고백하면서 다행히 자녀들이 성실해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면서 손자 자랑까지 겸했다. 긴 이야기 내내 꼿꼿한 자세를 지킨 여주인의 고진감래한 표정은 당당하고 평온해 보였다.

말없이 듣기만 민망해 고개를 끄덕이며 잘하셨다 위로하고, 노후가 평안해 다행이라고 덕담했다. 인생은 짧다. 그렇지만 불행하면 길어진다.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 선택하며 살아간다. 나는 길어지는 하루보다 짧아지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여주인 인생사에 빠져들어 가오리무침회를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2023.10.16.)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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