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장 횟집에서

2023. 9. 8. 09:36입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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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無盡藏)은 다함이 없이 매우 많다는 말이다. 어릴 때는 이 말을 자주 듣고, 썼다. 공부나 운동을 잘하는 학우를 보면 '쟤, 무진장 ㅇㅇ 잘한다'라거나 부잣집 아이에게는 '쟤네 무진장 부자'라며 부러워했다. 지금도 무진장이라는 말에는 변함 없이 푸근함을 느낀다. 며칠 전, 사랑하는 지인들이 만나 대화 시간을 가졌다. 건구불통(乾口不通)이라고 마른 입에는 뜻이 통하지 않는 법. 상호가 '무진장 회'라는 곳에서 만나기로 정했다. 집 이름만으로도 넉넉해 실망에 빠진 지인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걸로 예감됐다.

내비게이션을 숙지해 걸어간 동네의 모서리에 앉은 횟집은 작고 허름했다. 제법 소문난 집인지 손님들이 많았다. 홀에는 수족관과 테이블 몇 개, 신발을 벗고 드나드는 방에는 앉은뱅이 탁자가 일고여덟 개 놓였다. 빈 테이블이 예약한 우리 자리였다.

우럭, 밀치, 광어를 담은 모둠회가 나왔다. 대짠데 뭉텅뭉텅 썬 칼질이 마음에 들었다. 얄팍하게 썬 회는 젓가락에 몇 점을 한몫 집어야 하니 식탐 많아 보인다. 한 점만 집어도 씹는 맛이 구수한 큼직한 놈이 좋다. 스키다시로 나온 양미리도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연탄아궁이로 굽던 옛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렸다. 소주는 금복주 '참'을 주문했다. 이름이 좋아 나는 '참'을 마신다. 참은 이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상태다. 평소에 그러지 못하니 술 마실 때라도 잊지 않으려는 뜻이고, 취기를 견디는 데도 도움을 준다. 지인의 첨예한 태도는 밑바탕을 잘 깔아선지 처음과 달리 '참'답게 알아 듣고, 뭉뚱그리고 썬 모둠회처럼 조언을 포용해 결국 무진장 잘 마무리됐다. (2023.9.5. with: 4)

월배로88길 23

 

인연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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