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0. 09:30ㆍ입맛
며칠 전 친구들과 점심 먹으며 와인을 한 병 마셨다. 와인잔이 멋스럽고 잔 부딪치는 소리도 맑았다. 빛깔도 화려해 마시는 기분마저 으쓱했다. 평소 소주에 익숙해 있다 보니 세 손가락으로 잔을 들고 마시는 와인이 나 자신까지 고아하게 했다. 와인의 이미지에 덤으로 내가 얹힌 셈이었다. 덕분에 폼을 잡았으니,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와인 한 병이 소주 10병 값이었다.
유년 시절 어머니가 포도주를 담갔다. 여름이면 한 말 정도 담가 마루 그늘 밑에 넣어두고 아버지가 한두 잔씩 떠 잡수시곤 했다. 포도를 씻고 말려서 껍질을 까놓을 때 알 먹는 재미로 일손을 보탰다. 포도주 색깔이 궁금해 자주 확인하면서 검붉게 변하는 술 색의 신비에 감탄하곤 했다. 그때는 우리 집뿐만 아니라 집마다 포도주를 많이 담갔다. 포도주에 관한 첫 기억이다.
두 달간 스페인, 포르투갈을 여행할 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마트의 포도주를 샀다. 매일 마셨지만, 생산지는 매양 달랐다. 진열대에는 우리 돈 1,000원짜리부터 대략 천 단위 가격대로 진열돼 있었다. 만 원짜리부터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는데 고급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어느 마트에서든지 진열대는 항상 1,000원짜리가 먼저 다 나간 후 2,000원, 3,000원… 가격순대로 팔려나갔다. 두 달 동안 산, 가장 비싼 가격이 삼천 원대였다. 비록 저렴했지만, 매일 현지에서 직접 마셔본 바로는 ㅡ전문가는 아니지만ㅡ 그 맛이 꽤 좋았다. 현지 주민조차 저렴한 와인을 선호했다. 레스토랑에서는 마트와 달리 가격이 좀 비쌌다.
우리나라 TV 방송이나 신문 기사, 잡지의 기고문에는 고급 와인 중심으로 품평이 이루어졌고 로맨틱의 전유물인 듯 설파했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소비자는 값비싼 고급 와인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와인의 언급은 부족한 편이다. 상점에서도 낮은 가격대는 흔치 않다. 와인이 우아의 상징으로 보이는 것이 인식 차이인지 수준 차이인지 상술인지 분명치 않다. 나는 그저 분수에 맞게 소주 애(愛) 사로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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