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덕정 순교 터

2023. 4. 12. 15:50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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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에 온 김에 일몰, 일출을 보려고 하룻밤을 묵었다. 날씨가 나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 배로 제주에 왔다. 갈 때보다 배가 크고 속도도 빨랐지만, 요금은 이백 원 더 쌌다. 제주항에서 관덕정*까지 걸었다. 관덕정은 역사의 중심지로서 제주의 영욕의 역사를 지켜 본 곳이다. 백여 년 전 여기서도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되었다. 그때의 광장은 지금 자취도 없다. 아마 제주목 관아 복원과 연관 있을 것 같다. 오늘까지 순례는 162/167. 내일은 렌터카를 이용해 순례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공식 박해가 끝났음에도 천주교인들과 충돌이 잦았다. 그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 '신축교안(辛丑敎案)'이었다.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신축년 항쟁', '이재수의 난'으로도 불린다.

조선천주교 초기, 과한 선교로 제주 토착 신앙과 지역 풍습을 믿는 주민들과 충돌이 잦았다. 이때 지방관리가 세수 확보를 위해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중간 관리자로 천주교인을 이용했다. 결국 무리한 전교 활동과 조세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민란(항쟁)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지방관리와 주변 세력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되었으나 사건이 진행되면서 공격 대상이 천주교로 돌려졌다. 이에 따라 천주교인들이 관덕정에서 300여 명 넘게 처형받고 시신은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가매장되었다. 사건이 진정된 후 천주교회에서 별도봉 밑에 묻힌 무연고 교우 시신 31기를 황사평으로 이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관덕정에서 천주교인을 처형한 이재수 자신도 민란(항쟁)이 통제된 후 관덕정에서 교수형당했다.

천주교는 이 사건이 외세에 반감을 품은 민중들이 봉세관*을 습격하면서 천주교를 탄압 박해한 사건으로 보았고, 제주도 민중들은 제국주의와 외세에 맞선 항쟁으로 평가했다.

이 커다란 갈등은 백 년쯤 지난 2003.11.7. 비로소 제주도민(항쟁 기념사업회)과 천주교 제주교구 양측이 화해와 기념의 변을 발표했다.

* 관덕정(觀德亭): 조선 세종 때인 1448년 병사를 훈련 시키려고 세웠다. 관덕 명칭은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라는 뜻으로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으려고 지어진 이름. 편액은 세종대왕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썼으나 화재로 손실됐다. 현재 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썼다.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봉세관(封稅官):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


관덕정, 보물 / 당초 병사 훈련용 광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다.
호남제1정 / 탐라형승
정면 5칸, 측면 4칸.
창호 없이 사방 개방된 정자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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