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26. 08:12ㆍ여행의 추억

* 崇福寺址 三層石塔
*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 현지 안내판(요약)
석탑은 숭복사 터의 금당지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이다. 두 탑은 동일한 규모와 형태로 2층의 바닥돌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올렸으나 동탑은 2층 몸돌과 머리 장식 부분이 없어졌고, 서탑은 1층과 2층의 지붕돌만 남았다. 바닥돌의 위층 네 면에 2구씩 팔부신중상을 새겼고, 1층 몸돌에는 문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의 아래 받침은 4단이다.
지금의 원성왕릉(사적) 자리에 있던 곡사를 이곳으로 옮겨와서 '대숭복사'라고 하였는데, 최치원이 절을 옮기게 된 배경과 과정을 '초월산 대숭복사비'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절터에 남아 있던 비석의 받침돌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비석은 2013년 금당지 남쪽에 복원되었다.




* 답사 노트: 제38대 원성왕이 죽자, 곡사(鵠寺)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터에 왕릉을 만들었다. 곡사는 3km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햬 대숭복사로 하였고 조선 시대까지 존속하다 폐사됐다. 절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다가, 1929년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 亥治郎)가 ‘국사대웅(國寺大雄) 개와대웅(蓋瓦大雄)’이라고 쓰인 평기와를 발견한 바가 있고, 1931~1935년 사이 발견된 비석 조각으로 이곳이 대숭복사임이 밝혀졌다. 금당 앞에 두 기의 탑을 배치한 통일신라 시대의 쌍탑식 가람이다. 동, 서로 세워진 이곳의 삼층 석탑은 무너져 있던 탑재를 수습해 1970년대에 수리 복원했다. 몸돌 등 일부 부재가 사라져 쌍둥이 모습을 잃었다. 기단부 네 면에 팔부신중 8구가 양각됐다. 팔부신중은 사천왕에 버금가는 불교 수호신이다. 몸돌에는 감실을 상징하는 사각문 모형이 조각됐다. 두 탑은 우람했을 거구가 아담한 기형으로 보였지만, 천년 세월을 버텨온 탑에서 인고를 배운다.
최치원의 '초월산 대숭복사碑'


절터의 남쪽 가장자리에 고운 최치원이 찬술한 대숭복사의 연혁을 담은 '초월산 대숭복사碑'가 서 있었다. 2014. 2월 경주시는 필사본으로 남아있던 비문을 이용해 선생의 글씨인 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의 글자를 집자해 비석을 복원했다. 그 후 복원기 두 점을 새겼다. 자세히 읽어보니 비슷한 내용의 복원기 두 점을 만들기보다 그중의 하나는 비석 내용을 한글로 해석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들었다. 참고삼아 복원기를 옮겨둔다. (2024.1.16.)
● 복원기 2-1
신라 초월산 대숭복사비 복원기
신라 말기의 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귀국하여서 그는 시무십여조를 올려 국정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산비명*' 중 유일하게 신라의 수도에 세워졌던 이 비석이 없어졌음을 안타깝게 여겨 필사본으로 남아 있던 비문을 이용하여 복원을 추진하였다. 귀부의 복제, 이수의 복원, 필사본 비문의 오탈자와 행열을 맞추는 감교를 거쳐 선생의 글씨인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의 글자를 집자하여 비석을 중각 복원하였기에 그 뜻을 여기에 새겨서 기리고자 한다.
2014년 2월 경주시장
● 복원기 2-2
숭복사비는 진성여왕 10년에 세웠으며,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숭복사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왕후의 외삼촌이며, 원성왕비인 숙정황후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이 창건한 곡사에서 기원하였다. 그 뒤 원성왕릉을 곡사에 만들면서 사찰을 지금의 숭복사터로 옮겨 새로 세웠다.
뒤에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뵙고 사찰을 크게 수리하여 왕릉의 수호와 왕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헌강왕 11년(885)에 절 이름을 곡사에서 숭복사로 바꾸고, 그다음 해에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진성여왕 10년(896)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일찍이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으며, 비석을 받쳤던 쌍귀부와 비편 몇 조각만이 전하고 있었다.
경주시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던 비문을 교감하고 행렬을 맞추어 최치원이 짓고 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글씨를 이용, 비문을 집자하여 비신에 새겼다.
또한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쌍귀부를 복제하고 없어진 이수를 고증하여 이 비석을 복원하였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81cm, 비신의 높이는 204cm, 두께 33cm, 폭 100cm이다.
* 최치원(崔致遠, 857~908년 이후): 통일신라의 육두품 출신 문인. 자는 고운, 호는 해운. 경문왕 14년(874) 당에서 과거에 급제/ 헌강왕 11년(885) 당에서 귀국/ 진성여왕 8년(894) 시무10 조 올리고 아찬에 오름/ 효공왕 7년(899) 면직돼 가야산 해인사로 은둔함.
* 사산비명(四山碑銘): 최치원이 지은 비문 중 자료적 가치가 높은 4편을 모아 엮은 금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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