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7. 00:20ㆍ산티아고 순례길
2019.3.26.(화), 맑음.
22.4km(145.1km) / 5시간 20분
에스떼야에서 출발해 30여 분 지났다. 포도주로 유명한 이라체 수도원이 나왔다. 공식 명칭이 ‘산따 마리아 데 이라체 수도원 Monasterio de Santa Maria de Irache’이다. 11세기에는 순례자 병원으로 이용되었다가 17세기 초에는 베네딕토 수도회 대학교로 바뀌었다. 지금은 국영 호텔인 빠라도르로 활용되고 있다.
수도원을 지나다 보면 철문을 설치한 벽면에 수도꼭지가 두 개있다. 하나는 물이 나오고 또 하나에서는 포도주가 나온다. 비치돼 있는 작은 컵으로 한 컵을 받아 마시니 입안 가득 감칠맛이 돌았다. 어떤 이는 배낭의 조가비로 마시기도 하고, 빈 병에 한가득 받아 가기도 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다녀온 순례자라면 누구나 여기에서 한 잔의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다. 포도주의 샘 Fuente del Vino으로 불리는 이 수도꼭지는 ‘보데가스 이라체’라는 포도주 제조업체가 만들었다. 네모난 돌판에 “산티아고까지 힘차게 가려면 이 포도주 샘에서 한 잔을 따라 행운을 위해 건배하세요.”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어쩌면 포도주 제조사의 마케팅일 수 있겠지만 중세 시대 이 길을 걸어야 했던 목마르고 허기진 순례자에게는 그야말로 반가운 감로수였을 터이다. 우리도 고마운 마음으로 한 컵씩 마셨다. 그러잖아도 포도주의 나라에 왔기에 매일 저녁 포도주 두 병을 사서 마시고 있다. 한 명에 반 병꼴이다.
포도주 샘을 지나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산길을 넘어 루낀Luquin으로 가는 길과 평탄한 길을 따라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으로 가는 길이다. 갈등의 여지없이 순조로운 길을 택해 직진했다. 장거리를 걸어야 하기에 굳이 힘든 산길로 가고 싶지 않았다.
카미노는 대체로 순탄했다. 로스 아르꼬스에 이르는 길은 순례자를 제외하면 드넓은 포도밭과 농장뿐이었다. 길이 평탄하지만, 좌우로 펼쳐진 넓은 밀밭은 순례자를 고독하게 만들기도 했다. 문득 친구들이 어릴 때 밀 서리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이야 서리하다 발각되면 도둑으로 몰린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엔 눈감아주었다. 이 너른 밀밭에서 서리하면 주인에게 잡힐 일은 절대 없을듯싶었다. 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추억이 피로해소제였으니까.
로스 아르꼬스는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면서 가스띠야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두 왕국 어느 곳에도 세금을 내지 않으며 두 왕국의 상업적 특성을 잘 이용해 되레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발코니가 있는 아름다운 집들 사이의 골목길을 지나, 폭 좁은 오드론강Odron을 건너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이곳에도 순례자들이 몰리는 4월부터 개방하려는지 문이 굳게 잠겼다. 숙소를 구하려고 마을을 돌아다니다 Casa Alberdi에 투숙했다. 배낭을 풀고 아침에 남은 빵과 바나나 한 개로 점심 끼니를 때웠다.
Casa Alberdi는 주택을 개조해 만든 민박집이다. 8인용 도미토리에 우리 넷과 카미노에서 만난 한국인, 행정안전부 공무원 출신 우○현, 그와 친구인 부산시청 출신의 주○철 그리고 혼술을 즐기는 키다리와 함께 입실했다. 저녁 식사는 인근 알베르게에 숙박한 창녕 부부가 찾아와 아홉 명이 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다. 외부인이 들락거리는 것을 본 여주인은 돈을 내지 않고 몰래 숙박할까 봐 눈초리가 올라갔다. 객실을 감시하느라 기웃거리는 뚱뚱한 그녀의 표정이 사뭇 귀여웠다.
■ 이라체 수도원 Monasterio de Santa Maria de Irache
■ 무어인의 샘 Fuente de los Moros
■ 산타 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
참고로 산타 마리아 성당의 ‘순례자를 위한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번역]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아브라함을 칼대오 땅에서 불러내시고, 그가 방황할 때 보호해 주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산티아고 길을 걷는 당신의 종 저희를 보살펴 주시기를 청하나이다. 가는 여정 동안 동행이 되어주시고, 갈림길에서는 저희의 인도자가 되어주시고, 피로로부터 저희의 휴식처가 되어주시고, 위험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시고, 가는 여정에 저희의 쉼터가 되어주시고, 더위에 저희의 그늘이 되어주시고, 어둠속에 저희의 빛이 되어주시고, 좌절로부터 위로와 안식을 주시고, 계획을 위해서는 이루고자 하는 강인함을 주소서. 당신의 보호로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여정 뒤에는 기쁨과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도착할 수 있도록 당신의 은총을 내리소서. 언제 어디서나 저희와 함께 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천주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산티아고(사도 야고보),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성모 마리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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