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DAY | 팜플루나 > 뿌엔떼 라 레이나

2024. 12. 25. 00:12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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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24.(일), 맑음.
25.1km(100.6km) / 7시간




카미노 걷기는 일찍 시작해 일찍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순례자가 많이 몰리는 시기는 알베르게를 선점하려고 더욱 그렇다. 3월인 지금은 한산하지만, 체력을 관리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일찌감치 서두르는 게 낫다. 마음을 낮추어 길 위에 몸을 얹었다.

아침 어스름을 밟으며 도심을 지난다. 지난밤의 그 많았던 인파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썰렁한 바람만 어리대고 있었다. 도시에서도 카미노 화살표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주물로 된 표식이 인도에 촘촘히 박혀있어 마음을 놓아도 됐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표식은 길바닥이나 담장, 전신주, 나무줄기 등 어느 한 곳에는 반드시 있었다. 초행길이라도 카미노 화살표가 동행을 해 주니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표식을 따라 시내를 빠져나오니 외곽에 자리 잡은 나바라대학교가 나왔다. 교정을 가로질러 폭이 정말 좁은 사다르강Rio Sadar 위에 놓여있는 나무다리를 건넜다. 우리 같으면 도랑이라고 할 것 같은데 "뭐, 이런 걸 다 강이라고 부를까?" 싶었다. 한글처럼 어휘가 많지 않아서일까?

오늘 넘어야 할 해발 790m의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이 저 멀리 아스라하게 보였다. 능선에 도열하듯 서 있는 풍력발전기들이 마치 성냥개비를 꽂아 놓은 것 같았다. 무엇이든,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저 언덕만큼이나 높고 너른 품을 지녀야 하리라.

나바라대학 교정을 벗어났다. 자동차도로를 따라 걸어 팜플로나의 베드타운인 시수르 메노르Cizur Menor 마을에 도착했다. 좌우로 밀밭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한 남자가 하운드 사냥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공을 멀리 던지자, 하운드가 민첩하게 밀밭을 휘저으며 공을 찾아냈다. 평화롭고 부러운 풍경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뻬르돈 언덕의 풍력발전기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울퉁불퉁한 오르막길에서는 눈앞에 보여도 멀기만 했다. 왼쪽 멀리 별장마을 구엔둘라이Guendulain가 언덕 위에 솟아있다. 마치 성채 같았다. 목감기로 간밤엔 잔기침이 심했다. 괜찮겠지, 여겼는데 거푸 기침이 나왔다. 잠깐씩 쉬는 바람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용서의 언덕’ 기슭 마을인 사리끼에기Zariquiegue 입구. 풍력발전기를 배경으로 늘어선 집들이 한 폭의 풍경화를 방불케 했다. 벤치 옆에 여성 사진을 붙인 작은 철제 조형물에 누군가 운동화 한 켤레를 벗어 놓았다. 순례자 무덤인 듯했다. 마음속으로 평안히 잠들기를 빌었다. 풍력발전기가 점점 가까워졌다. 처음엔 성냥개비만 하던 것이 이제는 어른의 팔뚝만큼 커 보였다.


힘들게 오른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ón’. 능선을 따라 셀 수 없이 서 있는 수많은 풍력발전기가 웅장했다. 언덕 가장자리에 순례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책에서 많이 본 멋진 조각이다. 하나같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발갛게 녹이 슬었다. 1966년 ‘나바라 카미노 친구협회’가 철재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용서의 언덕은 용서해 달라는 사람도, 용서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자기 스스로 화두를 던져 마음을 여미는 곳이다. 용서의 언덕에 서고 보니 그동안 선하게 살아온 줄 알았더니 잘못한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겉으로는 경치에 취해 웃는 척해도 속으로는 미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이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애써 아량을 넓히며 잠시 머물다 발길을 옮겼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데로 우떼르가Uterga로 내려갔다. 길은 급경사 자갈길이었다. 마치 큰 돌만 골라서 쏙쏙 깔아놓은 듯했다. 서툰 걸음으로 주춤거린다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오른 만큼 내려가야 하고 가파르다가도 온순한 길을 내놓는 언덕길이 우리네 삶과 닮았다.

언덕길을 오르내렸더니 배가 고팠다. 우떼르가의 사설 알베르게 겸용 식당에 들어갔다. 종업원의 친절함에 허기가 주춤거렸다. 스페인 사람 같지 않아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봤다. “베네수엘라에서 돈 벌러 왔다”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가가 싼 스페인에서 알베르게 월급으로 어떻게 돈을 벌까 싶었다. 선한 눈망울의 그는 우리들이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햇발이 따스한 뒷마당 식탁에 점심을 차려 주었다. 점심이라야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 한 잔’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깍듯한 예우를 갖추어 맞아주어 고마웠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물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종업원의 감동을 곁들인 맛있는 한 끼였다.


오후 두 시쯤 뿌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해 공립 알베르게에 배낭을 풀었다. 샤워 후 식자재를 사러 나갔다. 마을 입구 알베르게에서 아르가 강변의 출구까지 골목 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약국을 제외하고는 돌출된 간판이 없었다. 출입구 벽에 상점 이름을 조그맣게 붙여 놓았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웠다. 길을 따라 직접 가봐야 바르인지 마켓인지 요식업소 혹은 숙박업소인지를 알게 된다. 기웃거리며 걷다가 도로 가운데쯤에서 마켓이 보였다. 출입구가 아파트 현관문 정도의 크기밖에 안 돼 무척 놀랐다.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꽤 넓었다. 입구가 이렇게 좁은 이유는 중세 시대에 세금을 부과할 때 대문의 크기를 세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켓에서 저녁과 아침 두 끼의 식품을 사는 데 25유로, 우리 돈 32,000원이 들었다. 4인분의 식품값에다 와인 두 병까지 샀으니 엄청난 착한 가격이었다.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김○주와 김○혜를 다시 만났다. 라면과 볶음밥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젊은 여성이 홀로 지구촌을 누비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주는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고 왔고 ○혜는 페루에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날아왔다. 두 사람 다 영어를 잘하는 용감한 청춘이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 비참하거나 교만해진다고 하지만, 내가 청춘일 때는 그러하지 못했기에 이 젊은이들의 패기가 마냥 부러웠다.




■ 오바노스, 세례자 요한 성당 Iglesia de San Juan Bautista

1912.11.17.에 완공되었는데 14세기에 지어진 과거의 성당에서 문과 가구를 옮겨와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