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3. 00:17ㆍ산티아고 순례길
2019.3.21.(목), 맑음, 순례 시작.
28.4km(28.4km) / 8시간 15분*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길 첫날이다. 해발 146m 생장에서 해발 952m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가려면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하나는 피레네산맥의 웅장한 풍광을 배경 삼아 걷는 나폴레옹 루트, 또 하나는 국도를 끼고 걸어 경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발까를로스 루트Via Valcarlos였다. 나폴레옹 루트는 적설로 길이 폐쇄됐다. 안전이 우선이기에 순례자협회가 권장하는 발까를로스 루트로 향했다. 예상과 달리 이 루트도 피레네산맥의 아름다운 계곡 길을 맛보기에는 충분했다. 그렇지만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운 순례길인 만큼 ‘카미노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나폴레옹 루트를 밟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발까를로스 루트의 공식적인 거리는 22.68km이지만 우회한 탓인지 구글 앱으로는 28.4km로 표시됐다.
카미노의 첫 아침은 옅은 안개로 덮여있었다. 미지의 세계 같았다. 안개 사이사이로 감질나게 드러나는 전원 풍경이 고상했다. 길은 도로에서 깊은 계곡으로 떨어졌다가 롤러코스터처럼 다시 도로로 올라왔다. 눈 돌리는 곳마다 자연이 살아 숨 쉬었다. 빼어난 경관에 발걸음을 멈추고, 긴 세월 자연이 만든 조화 속에서 우리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사소하고 수수한 풍광이 초로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걷는 것이 순례자의 몫이리라. 마음을 가다듬으며 사색의 길을 따라갔다.
발카로스 정상 부근에서 삼각형 모형의 ‘산 살바도르 데 이바녜따 소성당Capilla San Salvador de Ibañeta’이 나타났다. 11세기 수도원 터에 세워진 작은 성당은 1965년 완공됐다. 맞은편 언덕에 나바라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롤랑의 기념비Monolito de Roldán’가 세워져 있었다. 삼손과 같은 괴력을 가진 롤랑은 샤를마뉴 대제의 호위 부대를 이끌고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바스크인들의 기습을 받아 전멸했다.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이들의 유골은 론세스바예스의 성령 예배당에 안치됐다. 후대에 세워진 비석은 과거의 역사를 간직한 채 말없이 우뚝하게 서 있다.
오후 세 시가 넘어 ‘산타 마리아 왕립 성당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에 도착했다. 성당에서 순례자를 위해 알베르게를 운영한다. 관리인 태도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배정받은 숙소(12유로)는 규모가 크고 깨끗해 기분이 좋았다. 세탁물부터 정리했다. Casa Sabina에서 순례자메뉴(10유로)로 성대한 저녁을 먹은 후 20:00, 순례자 축복 미사에 참석했다. 순례자가 많지 않았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의 음성이 너무나 잔잔하고 부드러워 마치 성우 같았다. 라틴어 기도문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종교적 믿음을 떠나 기도해 주는 고마움을 마음속에 담았다. 미사가 끝난 후 신부님은 순례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잡아주며 축복을 건넸다.
순례자를 위한 기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하나둘씩 모여
길에서 만나 길을 메우고 길을 걸으며
길에서 길을 찾고 길에서 답을 구하며
그 길을 따라 묵묵히 걷는 사람들
그들의 걸음걸음에 그들의 머리위에 그들의 마음에
오로지 한분이신 당신께서 늘 함께 하시어
길을 찾아 답을 구하고 그 길을 따르기로 결심을 얻어
돌아가는 그 길까지 당신의 빛을 밝게 비춰 주소서!
* 순례자 기도문은 내용이 조금씩 다른 여러 종류가 있다.
하루 몇 시간씩 열심히 걸어서 한 달 이상 걸리는 순례길, 축복 미사는 마음가짐을 굳게 다잡아 준다. 그래서일까. 어깨에 멘 배낭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카미노를 완주하면 배낭엔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담길까. 종일 묵묵하게 걸어야만 하는 카미노의 흙길이 소박한 사유의 공간이 되어 줄 것 같아 고맙다.
* 구간별 거리는 구글 맵이 저장된 램블러앱을 활용하였고, 소요 시간은 휴식 시간을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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