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국립신암선열공원

2024. 9. 24. 07:42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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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부터 이틀 연속 비바람이 몰아쳐 무더위가 사라졌다. 새벽에 일어나 열어놓은 창문을 닫았다. 어제만 해도 살인적인 폭서에 시달렸는데 하룻밤 만에 서늘한 추위를 느끼게 하다니 자연은 참으로 위대하다. 아침부터 비가 그치길 고대했다. 점심 먹고도 그칠 기색이 없어,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챙모자도 쓰고 차를 몰아 집을 나왔다. 앞에서 달리는 차들이 도로에 고인 물을 차창으로 퍼붓는다. 찰나의 멘붕을 경험하면서 국립신암선열공원에 도착했다.

Y 교수님이 사전 협조 요청을 하였기에 경비원이 나와 주차를 안내했다. 함께 참배할 답사팀은 아직 오지 않았고, 찬비는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선열의 묘역에도 세차게 뿌려댔다. 국립신암선열공원은 일제에 항거하다가 희생하신 독립 유공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독립 유공자 전용 묘역이다. 그렇지만, 한낮인데도 인적이 없는 적막감에 비까지 내려 쓸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했다. 우산을 쓰고 서성거리니 도랑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아우성치듯 요란하다. 대구에 살면서도 신암선열공원은 처음이다.

교수님과 답사할 선생님이 모였다. 신암선열공원 소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김구일 부소장이 휴일인데도 우리를 도와주려고 나왔다. 쾌활하고 적극적인 마음씀씀이가 대민 정신이 투철한 공무원으로 보였다. 그의 안내로 단충사(丹忠祠)에 들어갔다. 제단 앞, 장식 조화의 사각 패널에 써 붙인 '追慕 ○○○ ○○ 답사자 일동' 글자를 보고 부소장의 센스에 살짝 감동했다. 참배는 엄숙하고 진지했다. 도열, 헌화, 분향, 경례, 묵념, 방명록 서명 순으로 진행됐다. 방명록 서명은 단순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글귀를 쓰고 싶었다.

남향으로 건립된 단충사는 이곳에 안장된 독립 유공자 52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참배 공간이다. 깨끗한 대리석 내부에 신을 신은 채 들어가려니 저절로 매무새를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위는 북쪽에 모셔져 있고 동, 서쪽 벽면에는 안장자의 사진과 생애가 금속판에 간략히 새겨져 있었다. 천장의 장식된 LED 조명등이 이채로웠다. 막대기 끝의 작은 등이 밤하늘 반짝이는 별처럼 빛났다. 순국선열들이 별이 됐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참배 후 우산을 쓰고 묘역을 둘러봤다. 부소장이 동행하면서 설명해 주었다. 묘역은 5개 구역으로 나누어 52위가 안장됐다. 이중의 서훈자 48위, 미서훈자 4위였다. 미서훈자는 뚜렷한 공적은 있으나 그 후의 행적이 불명확해 서훈하지 않았다. 묘소 일련번호는 공적과는 의미 없는 관리 번호이며 묫자리 또한 유족이 선택한 자리로 생전 공훈과 상관이 없었다. 비석은 있으나 상석이 없거나 둘레석이 없는 묘도 보였다. 후손들이 외국에 살아 이장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묘소가 있는가 하면 교육자 출신의 묘는 매년 학생들이 단체로 성묘를 오고 있다고 한다.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의 영향이 전해지는 셈이니 의미 있다. 비석의 글씨체는 볼거리였다. 요즘은 기계로 글씨를 새겨 모두 똑같다. 과거에는 석공이 정을 가지고 손으로 새겨 비석마다 글씨체가 달라 그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여성 지사는 단 한 분뿐이었다. 의아했다. 교수님이 여성들도 항일 업적이 많았으나, 근거 자료가 부족하거나 남아있지 않아 서훈을 못 받았다고 했다. 여성들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남성들 또한 밥하고 빨래하며 항일 투쟁이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됐다. 시대 상황이 가져온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남 화가의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는 여성들이 남성과 함께 독립투쟁한 사실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묘역에서 사위를 바라보면 아파트에 포위된 듯하다. 다행히 동쪽은 유구한 금호강이 선열공원을 어루만지며 말없이 굽이져 흐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풍광이 오히려 묘터를 더 장엄하다고 느끼게 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자연이지만, 훌륭한 인물은 자연에 못지않을 거라는 믿음이 새 움이 돋듯 느껴졌다.

평생 대구에 살면서 독립 유공자들이 안장된 신암선열공원에 처음 가 봤다. 나처럼 안 와 봤거나,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만 같다. 그동안 신암선열공원은 후손이나 기관장, 사회지도층만이 찾아가는 의전 장소로 여겨왔다. 참배를 드리고 나니, 만약에 애국선열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있을지 의문이 든다. 선열공원을 다녀오니 한층 성숙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국립묘지 신암선열공원의 참배와 답사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Y 교수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를 드린다. (2024.9.22.)

추 진 경 과

1955 현 위치 애국선열 묘 5위 안장
          * 대구 시립공동묘지(현재 대구대학교 대명동 캠퍼스)에서 이장
1957 경상북도에서 현 위치를 선열묘지 지정
1974 경상북도에서 대구직할시로 관리권 이양
1982 대구직할시 선열묘지설치및관리조례 제정
1987 선열공원 성역화 사업 추진
2018 국립 묘지 승격
 

시 설 개 요

○ 위치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
○ 면적 : 28,790㎡ (약 8,710평)
○ 시설 : 묘역, 단충사(참배동), 관리동, 화장실, 전망대
○ 안장기수 : 52위(서훈자 48, 미서훈자 4)
    * 서훈자: 독립장 1, 애국장 11, 애족장 32, 대통령 표창 4
    * 운동계열: 의병 3, 3·1운동 8, 국내항일 12, 임시정부 1, 해외항일 5, 광복권 11, 계몽운동 1, 문화운동 4, 학생운동 3, 미서훈 4
○ 묘역 현황 : 1묘역 9위, 2묘역 6위, 3묘역 14위, 4묘역 14위, 5묘역 9위
 

참 배 안 내

○ 참배 시간 : 09:00~18:00 연중무휴 가능
○ 참배 신청 : 홈페이지 신청 / 전화(053-945-5141) 문의 * 헌화는 사전 협조
○ 유의 사항 : 금연, 취사 행위 금지, 애완동물·이륜차 출입 금지, 음식물 되가져가기
 

대구 국립신암선열공원
단충사
참배 제단
안장자 소개(동쪽 벽면)
안장자 소개(서쪽 벽면)
천장 LED 조명등
일동 참배
의병을 조직해 격렬한 전투를 전개한 임용상 님은 1977년 훈격이 가장 높은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배학보 님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조국독립을 촉진시키는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현재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혜경(여성) 지사의 묘. 남편 김성국(미서훈자)과 아들 김석구(건국포장)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옆은 남편의 묘.
5 묘역에서 바라본 금호강 전경.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호강 전경.


※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공훈전자사료관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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