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3. 06:58ㆍ여행의 추억
당 태종이 모란꽃 그림 석 점과 꽃씨 석 되를 신라에 보내왔다. 선덕 여왕이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면서 정원에 심었다. 과연 그러하여 신하가 여쭈니 "꽃을 그렸는데 벌이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이다."라면서 "이는 당나라 황제가 내가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이 년 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은 분황사를 창건했다. 향기 芬(분), 임금 皇(황), 절 寺(사), '향기 나는 임금이 만든 절'이다. 당 태종을 조롱하고 싶은 작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최초의 석탑으로 추정하는 모전석탑을 보려고 분황사에 갔다. 주변에 황룡사지와 동궁과 월지, 반월성, 대릉원, 금관총, 박물관 등이 산재해 있다. 삼문을 들어서자, 한눈에 다 보이는 작은 경내는 생경한 석탑과 오래된 전각 한 채가 횅하다. 분황사는 왕실 사찰 황룡사에 붙었다 할 정도로 인접했다. 이래서 일연 스님은 절과 절은 뭇별처럼 맞닿아 있다고 했었나 보다. 번창했을 사찰은 안타깝게도 몽골 전란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금당이 불타 폐허가 되고 탑은 여러 차례 허물어져 겨우 명맥을 지탱하고 있다.
탑의 규모는 크고 듬직했다. 그동안 봐왔던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나 송림사 오층전탑과는 격이 달랐다. 탑을 쌓은 벽돌은 실제는 돌이라고 한다. 돌을 벽돌 크기로 잘라 만들었다. 현재는 삼 층이지만 원래 구 층이었다. 큰 돌을 벽돌같이 조그맣게 탁마하려면 석공의 손만으로는 어려웠을 듯하다. 백성들이 분담해 한마음으로 힘을 보탰을 것 같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암수 돌사자 4구를 배치했다. 암사자 2구는 얼핏 물개처럼 보였다. 자세히 볼수록 사자일 수도, 물개일 수도 있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돌사자는 원래 여섯 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탑을 수리하면서 네 구를 모서리에 배치하고 두 구는 박물관으로 옮겼다. 탑의 사면 가운데에는 감실을 두었고, 입구 좌우로 금강역사를 조각해 세웠다. 모두 여덟 구다. 수문장 격인 금강역사는 코끼리 백만 마리 힘에 버금가는 장사다. 입 벌린 모습은 공격 자세, 다물었으면 수비 자세다. 조각이 힘차고 섬세하다. 신라인은 돌을 떡 주무를 듯했다더니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선조들의 돌 다듬는 기술이 현대까지 전승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옛 탑을 바라볼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신라의 구 층 탑은 호국 기원 탑이었다. 종교의 힘으로 주변 아홉 나라(일본, 중국,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적, 고구려)의 침략을 막으려고 지었다. 처음에는 크게 지어졌으나 점차 많아지면서 조금씩 작아졌다.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 우리나라는 석탑이 많다. 석탑인 이유는 화재에서 탑을 보호하려고 돌로 지었다. (202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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