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2024. 9. 8. 07:19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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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을 보려고 백율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200여m 지척에 굴불사지이고, 백율사는 400여m 떨어져 있는데 주차장 이름이 백율사 주차장이다. 아마 백율사 유명세에 그렇게 작명했을 듯하다. 백율사 옛 이름은 자추사고, 자추사는 이차돈 순교를 추모하려고 세운 절이었다. 법흥왕 측근으로 신라 귀족 -성은 朴 아니면 金인- 이차돈이 불교를 국법으로 허용해 줄 것을 주장하다 순교했다.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쳐 올랐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 그리고 북산(현재 소금강산) 서쪽 고개에 장사 지내주고 절을 지어주었다. 이차돈 목이 날아와 떨어진 절이라는 백율사(자추사)는 몇 번 탐방한 바가 있어,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만 보기로 했다.

굴불사는 -삼국유사에-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백율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와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 네 면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했다. 지금은 터만 남았다. 석조사면불상은 -현지 안내판에- 서쪽 면에 아미타여래, 북쪽 면에 미륵불, 동쪽 면에 약사여래 남쪽 면에 석가여래를 배치해 사방불 형식을 따랐다고 한다. 백율사 바로 아래, 불상을 만들어 또 굴불사를 지었다. 신라는 불교를 삼국 시대에서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번성했다. 천이백 년 전 조각이 아직도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불두가 사라진 불상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사람들은 시계 방향인 서북 동남쪽으로 돌면서 기도했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멀찍이 기다리다 사진을 담았다.

석조사면불상에 도착했을 때 관리인이 비질하고 있었다. 땅바닥을 깨끗이 쓰는 일이 오히려 자기 마음을 청결히 닦는 수양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질 하는 모습에서 얼마 전 마음에 담은 황유원 시인의 시 '아침'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네팔의 라이족은 손님이 떠난 후 비질을 하지 않는다/ 흔적을 쓸어낸다 생각해서/ 손님은 떠나기 전 직접 마당을 쓴다/ 자기가 남긴 흔적 스스로 지우며/ 폐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깨끗한 마당처럼만 나를 기억하라고/ 쓸어도 쓸어도 쓸리지 않는 것들로/ 마당은 더럽혀지고 있었고/ 어차피 더럽혀지는 평생을 평생/ 쓸다 가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듣기 좋은 건/ 아침에 마당 쓰는 소리 (하략)
시인에게서 가끔 성자의 모습을 본다. 오늘 본 비질하는 관리인처럼. (2024.8.30.)

* 현지 안내판 기록 의견
(수정할 부분) 금고(金鼓) : 쇠로 만든 북
(의견) 금고(金鼓) : 북 모양의 종
(이유) 쇠로 만든 북이란 한자의 뜻풀이에 충실히 따른 해석. 절에서 여러 사람을 모을 때 치는 북 모양의 종을 금고라고 부르고 있다.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큰 바위 네 면에 새긴 여러 불상과 보살상.
깨끗하게 비질하는 관리인
(서쪽) 아미타여래상은 바위에 새긴 몸에 다른 돌로 불두를 만들었다.좌우에 배치한 보살상은 다른 돌로 만들어 세워 삼존불 형식을 갖추었다. 왼쪽은 머리가 사라졌다.
(북쪽) 오른쪽에는 돋을새김한 보살 입상이 있고, 왼쪽에는 얕은 선으로 새긴 관음보살이 있다. 11개의 얼굴과 6개의 팔을 가진 십일면관음보살이다. 선각이 세월에 지워지고 있어 희미하다.
(동쪽) 약사여래 상은 바위 면을 따라 몸 전체가 앞으로 쏠려 있어 입체감이 더 느껴졌다.
(남쪽) 원래 삼존상이 있었으나 돋을새김한 여래입상과 보살 입상만 남아 있다. 왼쪽 발판에 다른 돌로 만들어 세운 입상은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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