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흥덕왕릉의 비련

2024. 9. 4. 08:06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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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원성왕릉(괘릉)에 다녀왔다. 오늘은 그것과 유사하다는 흥덕왕릉을 보고 왔다. 능은 경주 시청에서 25km 정도 떨어진 안강읍 육통리에 있다. 신라 왕릉 중 가장 먼 곳에 떨어져 있고, 왕비와 합장했다는 유일한 능이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안내판이 뙤약볕에 말라붙은 듯 자그맣다.

군락을 이룬 도래솔 숲으로 들어갔다. 곧게 자란 소나무가 없고, 아우성이라도 치듯 제멋대로 꾸불꾸불하게 자랐다. 마치 울부짖는 형상 같아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능을 표시하는 돌기둥 화표석이 보였다. 원성왕릉 것보다 훨씬 키가 크다. 서역인을 닮은 무인석과 문인석은 각 한 쌍으로 크기가 비슷했다. 돌사자 네 마리는 봉분 모서리에 한 구씩 배치해 능을 지키는 형태를 강조했다. 제단과 둘레석에 조각한 십이지신상, 능을 보호하는 난간석 등 원성왕릉과 흡사했다. 그런데 난간석의 석주를 세로로 이어주는 죽석*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후대에서 누군가 기둥이나 받침으로 쓰려고 긴 원통의 돌을 모두 빼갔다. 안타까운 마음에 사방 십 리를 둘러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동쪽 화표석 인근에 흥덕왕 추모비를 업고 있던 귀부(거북받침)가 남아 있다. 비신은 사라지고 없지만, 주변에 흩어진 비편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나와 흥덕왕릉임을 알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흥덕왕릉의 형태는 외형상 원성왕릉과 쌍둥이 능이라 할 만큼 흡사했다. 손자의 능이 할아버지의 능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원성왕릉에 없는 귀부가 있고, 도래솔조차 슬픔에 겨워하지 않는가.


무릇 세상사는 겉모습과 달리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권력 암투일 경우에는 더욱 심화한다. 흥덕왕 김수종은 원성왕의 손자다. 형인 김언승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과 그 동생을 죽이고 언승은 헌덕왕으로 즉위하고, 수종은 이찬*이 됐다. 헌덕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흥덕왕이 됐다.
장화 부인 김 씨는 조카이자 애장왕의 누이동생이다. 애장왕이 죽임을 당할 때 장화 부인은 겨우 열서넛 살이다. 삼촌(헌덕왕, 흥덕왕)들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병사로 꾸며 당나라에 알렸다. 오 년 뒤, 두 오빠를 죽인 원수인 줄 모르고 장화 부인은 삼촌(김수종 후에 흥덕왕)과 혼인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었다. 헌덕왕이 죽자, 상대등*인 수종은 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스물여덟 살의 장화 부인도 왕비의 관을 썼다. 호사다마라고 왕비가 된 지 두 달 만에, 비극의 전말을 알게 된 장화 부인. 갈등 끝에 이승을 하직하고 명부로 떠났다. 비밀은 영원히 묻힐 수 없었다. 흥덕왕릉은 본래 장화 부인의 능이었다. 순애보로 알려진 흥덕왕은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십 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다 죽음에 이르러 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으로 사랑을 찾아갔다. (2024.8.30.)

* 죽석(竹石) : 석주와 석주를 이어주는 건너지른 돌.
* 이찬(伊飡) : 신라의 십칠 관등 가운데 둘째 등급. 자색 관복을 입었고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
* 상대등(上大等) : 신라 때에, 나라의 정권을 맡았던 으뜸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법흥왕 18년(531)에 두었고, 화백과 같은 귀족 회의 의장도 겸하였다.


구불구불한 도래솔
서역인 닮은 문인상, 무인상
도래솔 숲에서 바라본 왕릉.
흥덕왕릉. 깔끔하게 벌초했다.
능을 지키는 돌사자 1. 살아서 곧 뛰어나올 것만 같다.
돌사자 2. 죽석이 사라지고 석주만 남은 난간석. 도둑을 지키는 임무는 아닌 것 같다. 오직 혼령과 교감하지 않을까.
용맹스럽게 생긴 돌사자 3
1,188년 동안 교대 없이 경계를 서고 있는 돌사자 4
둘레석의 십이지신상(뱀)
추모비의 비신은 사라지고 귀부만 남았다. 왼쪽으로 왕릉이 보인다. 비석을 지고 있는 거북상은 용의 첫째 아들인 비희.
왕릉에서 바라본 전경
왕릉 옆에 자라난 두 그루의 소나무가 연리지로 연결됐다. 우연이 아닌 듯 숙명처럼, 마치 이승에서 못다 이룬 두 사람의 순애보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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