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원성왕릉(괘릉)

2024. 9. 2. 08:00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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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점심을 먹고 <원성왕릉>을 찾아갔다. 평일이어서 도로가 한산해 즐거운 마음을 더 했다. 왕릉에 도착하니 햇볕이 따가워 그늘에 들어가니 벗어나기 싫었다. 주변에 잡초가 길게 자랐다. 추석이 목전이니 벌초해야 할 것 같다.

원성왕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이다. 선덕왕이 사망하자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해 14년간 재위(785∼798년)하다 사망했다. 왕이 죽자, 곡사(鵠寺)라는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터에 왕릉을 만들었다. 도로 쪽에서 능을 바라보면 왕릉 구역은 담이 없어도 직사각형의 지역이 능히 짐작됐다. 멀리 둥근 봉분 위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왕릉이 하늘 아래 땅끝인 양 보이게 조성했다.

입구에는 육각형 기둥인 화표석과 무인상, 문인상, 사자상이 좌우에 도열했다. 왕릉 입구를 표시하는 화표석은 당나라 묘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원성왕은 재위 시절, 문적(文籍) 출신이 아니라도 당에서 학사(學士)가 된 자를 발탁해 중용했고 왕손 김준옹, 김언승을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 당과 교류했다. 문, 무인상 모습은 서역인 풍으로 혹자는 처용이라 하거나 사찰의 금강역사라고 주장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페르시아인으로 추정한다. 염라국 수문장의 생긴 꼴일까, 이렇게 만든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사가(私家)는 산 개가 지키고 왕릉은 돌사자가 지켰다. 좌우 각 두 구씩 네 구의 앉은 모습이 너무나 늠름하다. 달리거나 포효하는 것보다 의젓하고 당당하다. 네 마리는 동서남북 사방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의미이리라. 입구에서 능까지는 나무가 없는 공간이다. 앞으로 나아가니 풀이 많이 자라 푹신한 느낌이 든다. 능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높고 컸다. 능 앞의 제단도 가슴까지만큼 높고 컸다. 이것도 당나라 영향이겠다. 능을 보호하는 둘레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됐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능 뒤편에는 석축을 쌓아 둘레를 따라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물이 흥건하게 고여 조금 흘렀다. 원성왕릉의 또 다른 이름, '괘릉(掛陵)'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왕릉 조성 당시 이 자리는 절(곡사)의 연못이었다. 연못을 메워 능을 만들었기에 시신을 안치하려니 바닥이 축축했다. 대안으로,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어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그래서 걸 괘(掛) 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불렀다.

원성왕릉은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었고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왕릉은 사적(史蹟)으로 지정했지만, 입구의 문, 무인상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 등 총 10점이 일괄 보물로 지정됐다.
묘 터에 물이 괴면 범부의 묘조차 쓰지 않는다. 하물며 왕의 능을 조성했다니 의아하다. 연못을 메워 물이 축축하게 고이는 자리에도 왕릉을 거침없이 만들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습기가 가득 차는 석굴에도 석굴암을 조성했고, 팔만대장경을 완벽하게 보관하는 장경각도 만들었다. 선조들은 습(濕)을 극복해 내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 장비가 필요 없이 습기를 지배하는 비법이 후대로 전승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2024.8.29.)

입구에서 바라본 원성왕릉.
동편의 문,무인상, 육각형 돌기둥.
서편의 무인상과 문인상
서편에서 동편으로
동편 사자상
서편 사자상에서 바라본 왕릉.
원성왕릉
도리석의 십이지신상(말)
수로가 능의 반을 싸고 있다.
능 뒤편에 석축을 쌓고 수로를 만들었다.
능에서 바라본 입구 쪽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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