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사지 십층석탑

2024. 8. 21. 08:13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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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2가에서 볼일을 마쳤다. 서울 사는 친구가 탑골 공원에 "국보 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다면서 가까운 곳이니 보러 가자"고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러잖아도 서울 오면 문화유산 하나라도 보고 가려고 마음먹었는데 권하는 친구 말에 기분이 좋다. 서울 지리에 맹탕인 나는 친구를 따라 탑골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딴판이었다. 언덕을 끼고 잔디 광장과 규모의 수목이 우거진 큰 공원으로 상상했는데 동네 공원같이 자그맣다. -노인들의 안식처라고 친구가 말했지만- 하릴없는 노인들이 그늘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시멘트 마당에 정자 하나가 덩그렜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유서 깊은 장소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겉모습에 살짝 실망했다.

옛 원각사지는 현재의 탑골 공원이다. 십층석탑은 팔각정을 지나 가장자리쯤에 있었다. 온실 같은 직사각 유리 박스에 갇혀 마치 체포된 듯한 모양이지만, 풍화작용으로부터 탑을 보호하려는 조처였다. 유리에 햇빛이 반사돼 탑이 잘 보이지 않아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얼굴을 유리창에 맞대 살펴봤다. 그동안 보았던 탑들과 달리 기이한 모형이고 탑에 새겨진 수많은 형상들의 세밀한 조각이 놀라웠다. 창을 통해서는 자세히 볼 수 없어 현지 안내판을 읽었다.

세조가 세운 원각사의 터에 남아 있는 12m 십층석탑은 1467년(세조 13)에 완성, 십층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이었다. 탑은 亞자 모양의 기단이 세 겹인데 용과 연꽃, 삼장법사의 일행, 부처님 일생 등이 조각돼 있다. 몸체에는 법회 장면을 새겼다. 대리석으로 만든 조선 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고려 시대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과 매우 비슷하다. (안내판 요약)

지금은 대리석 탑의 색이 바랬지만 처음 조성하였을 때는 한양 도성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흰 자태를 뽐냈을 거다. 조선 중종 때 원각사가 폐사된 이후 석탑 주변은 주거지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에는 흰 탑이 있는 동네라 해서 백탑동이라 하고, 이 일대에 살던 박지원, 이덕무, 서상수, 유덕공 등이 스스로 백탑파라 칭하면서 활동했다. 1902년 7월 이 탑을 처음으로 학술 조사한 세키노(동경제대 조교수)는 10층과 13층 설을 절충해 '다층석탑'이라는 모호한 이름을 제기한 바도 있다.
불교에 정통해 왕자 시절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왕이 되어서는 월인석보를 간행한 세조이니만큼, 원각사 십층석탑 조성에도 왕실의 안녕을 빌고 국태민안과 불법이 빛날 것을 기원하면서 심혈을 기울였으리라. 탑 전체에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장엄한 불국토를 표현했다. 대리석이라는 부재에 몽골, 라마 불교의 외래적인 요소가 보태져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를 지닌 걸작품 탑이다. 고려 시대 1348년(충목왕 4)에 건립된 '경천사 십층석탑'과 쌍둥이 탑이라 할 만큼 비슷하다고 하니 아마도 깊은 사연이 숨어있을 듯하다.

고귀한 문화유산을 보면 선조들의 깊은 정성이 느껴져 감동한다. 현대의 건립하는 시설물들은 섬세한 예술적인 부분을 놓치는 것 같아 아쉽다. 내 안목 부족으로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이겠다. 앞으로 세월이 지나면 선조들의 그것처럼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오백오십여 년 전에 건립한 대리석 탑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2024.7.7.)


마모 방지를 위해 유리각을 덮었다.
기단부는 한자 亞(아) 자 형이고 조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몸체 조각은 유리막 빛으로 잘 보이지 않았다.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1884년 미국 외교관 퍼시벌 로웰이 민가 지붕 위에서 찍은 사진. 초가는 드물고 기와 지붕이 많다. 백악산(북악산) 원경을 구도로 잡아 탑의 기단부가 많이 가려졌다. (사진 출처: 우리문화신문)
1901년 체코의 여행가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가 찍은 사진. 주변에 민가가 많이 보인다. 기와집들로 봐서 부유한 동네일 듯하다. (사진 출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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