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0. 12:34ㆍ여행의 추억
한 지인이 말하기를 청도에 사백 년 된 내시 고택이 있다고 말했다. 내시는 조선 시대 왕명의 전달이나 궐문 수직 등을 맡아보던 벼슬아치인데 궁궐이 있는 서울에 살았을 텐데 어떻게 머나먼 남쪽의 청도에서 살았을까 궁금했다. 사연은 알 수 없으나 고택이나마 살펴보고 싶었다.

조선시대 내시는 내시부(內侍府) 소속으로 종2품 상선(尙膳)에서 종9품 상원(尙苑)까지 140명이 있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됐다. 내시는 흔히 만들어진 제3의 성이라고 일컫는다. 인접한 중국과 멀리 이집트, 그리스, 로마, 튀르키예 등 지중해에서부터 아시아 지역에 걸쳐서 존재했다. 왕명을 구두로 전하므로 측근자로서 권세를 떨쳤다. 최고 권력자인 왕과 대신(大臣)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청도 금천면 임당리는 조선 중기부터 400여 년간 내시 가문이 살았다. 고택은 구한말의 내시로 상선의 품계를 받은 운림 김병익(1842~1925)이 낙향해 지었다. 그의 호를 따 운림고택으로 불리거나 김 씨 고택이라고도 했다. 1988. 3월 고택의 사당 마루 밑에서 '내시부 첨지 김병익 가세계'라는 두루마리가 발견됐다. 임진왜란 직전 청도에 들어온 내시 가문의 족보였다. 내시는 양자를 두고 가계를 이었다. 400여 년간 2대부터 16대까지 이름과 관직, 부인의 본관, 산소 위치 등이 기록돼 있었다. 갑오개혁으로 내시 제도가 폐지된 이후 17대 김문선은 직첩(職牒)만 받고 내시 업무는 하지 않았다. 18대 이후에는 정상적인 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임당리에 들어서자, 마을을 관통하는 글방천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공사장 주변에 차를 세우고 주민에게 "운림고택" 위치를 물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기에 "내시 고택"이라고 말하자 "아, 김 씨 고택"이라면서 찾아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고택의 명칭이 세 가지나 됐다. 시골에서는 한 번 면장은 평생 면장댁으로 불리는 데 비하면 상선의 벼슬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고택은 임당1리 마을 회관을 지나 임시 가설한 다리를 건너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기와를 얹은 아담한 돌담이 길게 나타난다. 담장 모서리에 'SBS 불타는 청춘 촬영지' 팻말이 반갑게 맞는다. 운림고택이었다.
담장 너머 본 집터는 내시 가문이 천석꾼이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 상당히 넓었다. 대문 앞의 안내판부터 살펴봤다. 건물 배치도와 유래가 새겨져 있었다. 대문채, 큰 사랑채, 중사랑채, 안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사당 건물 등이 있다. 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로 등록돼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왼쪽에 큰 사랑채가 홀로 있고, 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협문 오른쪽에 중사랑채가 있고 판벽에 하트 모양의 작은 구멍이 세 개 뚫렸다. 'ㅁ' 자형 안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도 네모났다. 안채 앞에 있는 고방 두 채가 매우 컸다. 앞뒤 마당도 상당히 넓었는데 천 석의 곡식을 추수하려면 필요한 규모일 것 같다.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 옆 중사랑채 판벽의 뚫린 하트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보이는 것은 사랑채 댓돌. 아마도 중사랑채에 든 손님의 숫자를 파악하려고 벗어놓은 신발을 헤아리기 위한 구멍일 것이다. 내시 고택이 보통 양반가와 다른 점은 북서향을 바라보는 안채다. 낙향했을망정 임금님이 계신 대궐 쪽 방향으로 집을 지어 충성심과 은혜를 잊지 않은 모습을 견지했다.
내시는 한때 세도가 따라다녔겠지만, 항간의 오해와 편견을 많이 받았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현재도 내시의 역할을 하는 권력자는 수두룩하다. 청도의 감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씨 없는 감이 나는 고장인 것도 -내시 가문이 청도에 정착하기 전부터 씨 없는 감이 재배되었으나- 마치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낀 탐방이었다. (2024.2.18.)















내시(內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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