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1. 00:09ㆍ여행의 추억
가을을 형관(形官)이라고 했다. 풀잎이 빛을 바꾸고 나무가 이파리를 벗는다고 (歐陽修) 시인이 가을에 벼슬을 달아 주었다. 두 글자로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담은 시상이 놀랍다. 그 형관을 만나려고 토요 산행을 열흘 미루어 팔공산에 들었다. 팔공산은 한창 가을에 물들어 가는 중이었다. 산행 코스는 부인사에서 이말재, 마당재, 가마바위봉(1053.9m), 톱날바위(1020m)를 거쳐 삼거리(팻말 번호 110)에서 하산해 이말재로 원점회귀 해 부인사로 돌아오는 거였다. 워킹 산행의 묘미가 집약된 이 코스를 우리는 간단히 휘돌고 송림사 인근 맛집에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다.
10:30. 절집 마당의 백오십 년 된 거목 왕벚나무가 아침 빛을 듬뿍 담은 불콰한 잎을 뿌린다. 스님을 유혹하려는지 여인의 가는 허리처럼 가지를 살랑거린다. 천년 석탑은 못 본 척 시치미를 뚝 떼며 근위병의 부동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돌담을 끼고 숲으로 들었다. 푸르던 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가을 동화의 첫 장을 펼쳐 놓았다. 일행들의 즐거운 소음과 함께 이말재에 도착했다. 안내 팻말은 벼락 맞은 나무로 적어놓았다. 그 고사목 옆에 큰 넓적 돌이 있다. 19줄만 그으면 연상 바둑판이다. 선이 없으니, 신선용이런가. 형들이 돌 하나 손에 쥐고 마주 앉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산에 깊이 들어갈수록 추색이 완연하다. 12:25 마당재에 도착했다. 능선이다. 계획상으로는 산행을 마쳐갈 무렵인데 겨우 능선에 올라섰다. 갈 길의 반에도 못 미친다. 왕년의 기준이 마음을 지배해 고까짓 것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게 아니다. 마음만 청춘이고 발길은 천근만근이다.
능선에는 사위가 거침없이 펼쳐졌다. 공활한 파란 하늘 끝에 가물거리는 먼 산, 점점이 떠 있는 흰 구름, 능선 좌우를 수놓은 단풍이 마치 심 봉사가 처음 눈 떠서 보는 세상인 양 아름답다. 다이돌핀이 샘솟는 감동이다. 팔공산은 동봉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육산(肉山)으로 동양의 마음씨 고운 새색시 같은 능선이다. 서쪽 능선은 서양의 말괄량이 소녀다. 기복이 심하고 이가 어긋나고 발붙이기 힘든 바위가 많은 골산(骨山)이기에 산꾼들이 만든 별명이다. 가마바위봉과 톱날바위에서 보는 경치는 시간을 지체해도 머물만했다. 가을의 상징인 빛과 단풍을 갖추었다. 적막강산인 하산 길을 급하게 내려오니 15:30 부인사다. 램블러를 보니 8km 거리에 1시간 휴식하고 4시간을 꾸물거렸다. 두세 시간 가볍게 돌고 점심 먹자는 계획이 약체로 무산됐다. 그런데도 山이 국립공원으로 승격돼, 사이즈가 커졌다며 우리 탓이 아닌 듯 너스레를 떤다. 아, 가을이다. (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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