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5. 00:16ㆍ여행의 추억
오래전이었다. 필리핀에서 조랑말을 타고 휴화산에 올랐다. 함께 타고 가던 마부가 혼자 타도 되겠다고 했다. 그러잖아도 비썩 마른 조랑말을 두 사람이 타고 가기엔 불쌍했는데 잘 됐다 싶었다. 화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내리막인데 갑자기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세우려고 했지만, 방법을 몰랐다. '워워, 스톱, 중지, 서라' 등 갖은 말로 고함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쇠귀에 경 읽기였다. 계속 달리던 중에 오른발이 철사로 만든 허술한 박차에서 빠져 말에서 떨어질 지경이었다. 요행히 배 옆에 바싹 붙어 갈기를 붙잡고 다시 올라타는 묘기를 부렸다. 가이드와 일행이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정작 본인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곡절 끝에 안장에 올라타고 어쩌다 고삐를 당기게 되어 말이 섰다. 위험천만했던 이 경험은 그 후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로 만들었다. 누구나 큰일을 겪고 나면 조금은 통이 커지는 모양이었다.
그 후 몇 년 뒤, 말이 갑자기 달리게 된 원인을 깨달았다. 내리막길에서는 기수들이 중심을 잡으려고 몸을 뒤로 젖히지만, 생초보는 앞으로 쏠린다. 몸이 앞으로 기울면 발이 뒤쪽으로 가면서 말의 배를 꽉 누르게 된다. 말은 배를 차면 달리라는 신호다. 오작동을 명령으로 알고 열심히 달린 것이다. 세울 때는 고삐를 힘 있게 끌어당기면 말이 고개를 들게 돼 앞을 볼 수 없으므로 서게 된다. 좌우로 가려면 원하는 방향으로 고삐를 당기면 됐다. 사건(?) 후 제주도에 가면 말을 탔다. 말 타는 목장에는 카우보이들이 타는 키가 큰 말뿐이었다. 조랑말들은 한가로이 풀만 뜯고 있었다.
제주 말은 과하마(果下馬)다. 체구가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馬)이라는 뜻이다. 조랑말, 탐라마, 토마, 제마 등으로도 불린다. 털색이 다양하고 몸집은 작지만, 체질이 건강하고 성질은 온순하다. 제주에서 조랑말을 본격적으로 목축한 것은 몽골 지배기 때부터다. 온난한 기후와 맹수가 없는 초원인 데다 사면이 바다로 격리돼 말이 달아나지 못하므로 키우는데 최적지였다. 몽골에서는 양마 기술자인 목호*를 대거 파견했다. 순종의 몽골 말을 길러내게 해 군사용으로 공출받아 몽골 제국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그 당시 몽골의 양마 기술은 세계 최고로 탐라인에게는 비밀에 부쳤다. 몽골종 말은 과하마와 교미도 엄금했다. 그럼에도 당대의 하이테크인 양마 기술은 목호들이 탐라 여인과 혼인해 살면서 자식과 테우리*에게 서서히 전승됐다. 몽고가 물러난 후에도 고려는 과도한 말 공출을 계속 요구해 목호들이 분란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목호와 그 가족 등 삼천여 명을 깡그리 토벌했다. 그 결과 세계 제일의 양마 기술이 탐라에서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후 양마법을 몰라 제주말은 왜소해졌다.
제주말을 볼 때마다, 제주에서 길러낸 조랑말을 타고 인류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대 기록을 남긴 정복자들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하나의 사건에는 동전처럼 양면성이 있다. 현대 사회도 옛일을 교훈 삼아야 할 것들이 없지 않을 것 같다.
* 목호(牧胡) : 고려 시대에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고인.
* 테우리 : 우마를 방목해 기르거나 돌보는 사람. 제주 방언.
* 몽골 제국의 영토 :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일부, 터키 일부,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까지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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