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남성의 필수품, 갓

2025. 4. 12. 09:16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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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 복식문화실


국립대구박물관 복식문화실에서 한복의 장식품으로 <갓>이 소개돼 있었다. 어릴 때는 많이 봤는데 늘그막인 지금은 구경하기조차 어렵다. 할아버지와 고향 어르신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갓>에 관해 국립대구박물관의 해설 자료를 발췌, 요약했다.

뿌리 깊은 나무 송중기, 인터넷에서 펌



'갓'은 일반직으로 챙(차양)이 있는 모든 모자를 뜻한다. 좁은 의미로는 조선시대 남성의 흑립을 의미한다. 갓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일 만큼 역사가 오래된 모자다. 시대가 흐르면서 갓의 형태, 재료, 제작법이 다양하게 발전했으며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갓은 양반과 평민의 모든 계층이 격식을 갖추어 외출할 때 반드시 착용하는 모자였다. 유행에도 민감해 시기에 따라 갓의 크기가 달라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갓의 모정은 높고 좁아졌으며, 갓의 챙은 어깨를 덮을 정도로 커지기도 했다.

조선남녀상열지사 배용준, 인터넷에서 펌


갓이 독특한 조형미를 가지게 된 것은 제작 방식에 있다. 갓은 말총(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과 대나무를 쪼개서 아주 가늘게 만든 대오리로 만든다. 갓의 몸통과 챙은 각각 따로 만들어서 조립했다. 대중적으로 착용했던 흑립은 먹칠과 옻을 여러 번 칠해 선명하고 맑은 검은색을 표현했다. 이는 흰색의 도포와 어우러져 세련되고 우아한 조선 선비의 기품을 보여준다.

남성들은 관례를 치른 후 상투를 튼다. 그리고 동곳으로 고정하고 망건을 두른다. 망건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물건이다. 망건 중앙에는 반달 모양의 풍잠을 달아 갓을 고정해 준다. 이것의 윗부분을 '당', 아랫부분은 '편자'라고 한다. 편자의 귓가 근처 부분에 당줄을 고정하는 관자를 단다. 관자와 풍잠으로 신분을 구분하지는 않지만, 재료로 쓴 사람의 신분을 나타낸다. 관자는 신분이 높을수록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선호했다. 양반은 가장 먼저 머리카락으로 상투를 틀고, 그다음 망건을 두른 뒤에 탕건을 쓰고 갓을 착용했다.

성균관 스캔들 유아인, 인터넷에서 펌


갓끈은 갓 챙의 좌우에 고정해 가슴까지 늘어뜨리는 장식품이다. 주로 수정, 마노, 유리, 대모, 대나무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당상관(정3품) 이상의 관리들은 신분에 따라 지정된 재료를 사용했고, 일반인들은 갓끈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았고, 남성들의 대표적인 장신구로 자리 잡았다.

쓰개는 머리를 보호, 장식하고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에 쓰는 모자다. 쓰개에는 관모(冠帽)와 내외용 쓰개가 있으며, 관모는 용도와 형태에 따라 나눠진다. 머리를 감싸는 건(巾), 차양이 있는 갓(笠), 실용 목적의 모(帽), 신분을 나타내는 관(冠)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깔 모양의 절풍(折風)과 새의 깃털을 장식한 조우관(鳥羽冠)이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복두(幞頭)와 관복이 들어와 널리 착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복두는 우리 고유의 관모로 정착되고, 관리들의 모자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정자관, 당건, 유건, 복건, 굴레, 조바위, 남바위


양반은 실외는 물론, 실내에서도 맨상투를 보이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여겼다. 실내에서 쓰는 모자도 종류가 다양했으며, 챙이 없는 건과 관으로 나눈다. 건에는 탕건, 관으로는 정자관, 사방관 등이 있다. 특히 정자관은 양반들에게 있어서 갓만큼이나 애용한 모자였다.


그것이 알고 싶다, Q&A

구르미 그린 달빛 박보검, 인터넷에서 펌


* 갓은 조선 선비의 명품
갓 하나를 만드는 데는 2~4주의 시간이 결린다. 아무나 갓을 만들 수 없었다. 갓 일을 하는 사람만이 만들 수 있었다. 갓은 조선 시대에도 아주 비쌌다. 그래서 소중히 다루었고 행여나 부서지면 수리해서 다시 사용했다. 갓은 일회용품이 아니었다. 선비에게 갓과 갓끈 장식은 스스로를 빛내주는 화려한 명품이었다.

* 신분제를 상징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조선의 신분제도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거역한 제도였다. 옷으로 신분과 관직을 구분하는 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갓은 결혼한 양반을 대변해 주는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갓은 원래 누구나 쏠 수 있는 것이 아닌 양반의 전유물이였다.

* 갓을 쓰고 뛸 수 있을까
조선시대 선비의 예절 중에는 갓을 쓴 채 뛰어서는 안 된다. 갓은 '선비는 절대 뛰어서는 안 된다'를 전제로 해 만들어졌다. 갓을 쓴 채 뛰면 뒤로 벗겨진다. 갓을 쓴 선비는 유유히 걸을 때가 가장 멋있었다.

* 갓은 왜 검은색일까
갓이 검은색인 이유는 먹칠을 했기 때문이다. 먹칠을 할 때는 갓의 눈이 막히지 않도록 꼼꼼히 칠해야 한다. 먹칠하고 나면 아교 칠을 골고루 한다. 그 뒤 옻칠해 갓을 오랫동안 쓸 수 있도록 마감한다.

* 수많은 갓들이 100년 만에 왜 사라졌을까
1894년(고종 31)에 신분제가 폐지되고, 1895년에는 단발령이 실시됐다. 이로 인해 차춤 선비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상투와 망건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갓 쓰는 풍습이 사라지자, 갓을 버리게 됐다. 우리나라의 장례 풍습 중에는 죽은 사람의 옷을 함께 태우기도 한다. 이러한 풍습으로 옷과 함께 갓이나 망건, 탕건이 함께 태워졌고, 후대에 전해지는 물건이 많지 않게 됐다. 갓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소재는 유기물질들로 구성돼 오랫동안 보관하기가 어렵다. 갓은 관리가 쉽지 않은 물건이었다. 제작, 수리, 보수가 모두 까다롭고 어렵다. 장인이나 기술을 보유한 사람이 없으면 만들 수도, 보수도 할 수 없다. 기술자들의 사라짐은 갓을 더 이상 생산할 수 없음을 의미 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갓들이 많이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 '트집 잡다'는 말은 갓에서 유래한 말
트집 잡는다라는 말은 '공연히 조그마한 홈집을 잡아 말썽이나 불평을 한다'는 뜻이다. 원래 한 덩어리가 돼야 할 물건이나 한데 뭉쳐야 할 일에 벌어진 틈을 일컫던 말이다. 본디 '트집을 잡다'라는 말은 갓의 양태(챙)를 뜨거운 인두를 가지고 곡선을 다듬는 작업에서 유래했다. 트집을 잡으면 양태의 중간 부분이 블록하게 튀어나오면서 곡선이 된다. 갓을 만드는 데 가장 까다롭고 중요한 작업이 바로 트집 잡기였다.

* 갓의 대오리 두께는 얼마나 얇을까
갓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대오리는 그 두께가 0.5mm 내외일 정도로 죽공예품 중 가장 얇다. 그만큼 대오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공정과 노력이 필요했다. 갓에 쓰이는 양태(챙)를 만들기 위해 550개 내외의 많은 대오리가 필요했다. 갓 장인들의 숙련도에 따라 양태 하나를 만드는 데는 2~4주의 시간이 걸렸다.

* 갓을 쓴 선비는 실내에서 벗을까
조선시대의 남성 중 일부 계층의 사랑들을 제외하면 모두 머리에 쓰개를 착용하고 외출했다. 선비는 외출할 때 반드시 갓을 썼다. 선비가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갓을 벗고 탕건 등을 썼다. 그러나 선비가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방안에서도 갓을 벗지 않았다. 서로 갓을 쓴 채 얘기를 나누었다.

* 갓 대우(모자)는 왜 원통형일까
갓은 크게 대우(모자)와 양태(챙)로 구분한다. 양태는 기능적으로 햇빛을 가리고 비틀 막아주기도 하지만, 선비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조선시대 모자로는 갓, 평량자, 초립, 갈모, 관, 유건, 벙거지 등이 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모자의 윗부분이 높다. 이는 조선시대 남자들의 상투가 대우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자들은 남자의 상투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도록 가려주는 효과가 있다. 갓은 연산군~중종 때에 원통형의 대우 모양으로 확립됐다. 선비가 쓴 갓 속에는 탕건과 상투가 숨겨져 있었다.

구르미 그린 달빛 박보검, 인터넷에서 펌


* 갓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썼울까
조선시대 인구는 1789년에 740만 명이었고, 이 중 남자는 360만 명이었다. 1864년(고종 1)에는 682만 명, 대한제국 때의 인구는 1906년(광무 10)에 1,293만 명이었다. 남자 중 선비의 비율을 감안하더라도 조선 시대에 갓을 쓴 사람은 수백만 명이 넘었다. 길을 나서면 갓 쓴 사람이 어디에나 있었다. 수백만 점이 넘던 우리의 갓들은 불과 100여 년 만에 400~1,000점 정도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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