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시산제

2025. 2. 16. 00:24일상다반사

728x90


삼십여 년이 넘는 세월이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렀다. 흘러가지 않고 마음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情이다. 지금의 등산 모임은 자연을 마음껏 즐기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산행을 하지 못한다. 헐거운 배낭을 메고 긴장하지 않는 동네 뒷산을 운동하는 수준이다. 이를테면 시니어 등산회다. 산에서 간식을 하지만, 밥을 먹지 않는 것도 한참 됐다. 매월 산행을 마친 후 식당에서 사 먹는다. 수십 년 넘는 궤적을 가진 등산회지만, 수십의 회원이 열여섯 명으로 고착됐고, 회장은 두 번째, 총장(우리는 총무를 총장이라고 한다.)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흔치 않으리라 본다.


오늘은 을사년 시산제를 모셨다. 매년 꼭 하는 의례다. 오래전부터 제수용 돼지머리를 먹기 좋은 수육으로 바꾸었고, 근래부터는 산불을 조심하려고 촛불과 향도 켜지 않는다. 제물의 종류와 수량도 알맞게 준비해 낭비하지 않는다. 제문을 해마다 달리했으나 이제는 건강과 화목 바람뿐이다. 특기사항은 시산제 절값이다. 성의껏 내던 절값을 몇 년 전, 총장의 아이디어로 연회비를 절값으로 낸다. 원거리 산행 등 경비 쓰임이 줄어들어 여유 자금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값이 연회비 성격을 갖게 되자 회원들이 정말 특별하지 않은 경우 외에는 시산제에 불참하지 않는다. 이심전심이 통하는 거다.


○○ 산악회에서는 올해부터 시산제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전언을 들었다. 집 제사가 사라지는 마당인데 시산제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나와 그렇게 됐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 "우리는 어찌 할 거야?" 말하자 또 누군가 "연회비 내려면 시산제 해야지". 농문현답(弄問賢答)에 매년 즐거운 시산제를 하기로 못 박았다. 시산제는 회원을 단합시키는 힘이 있다. 시산제로 총장은 미납 없는 거금의 절값(연회비)을 챙기고, 회원들은 음복연으로 안부를 나눴다. 늘 그랬듯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자리를 떴다. 함지산을 휘돌아, 식객 허영만 백반 기행에 6번 출연한 '화개장터 가마솥국밥' 집 좁은 방에 둘러앉아 부대끼며 수저를 들었다. 裵 원장이 플라스틱 카드를 총장에게 슬그머니 전했다. 사람 정이 이끼처럼 초릇초릇 돋는 우리는 '시등회'다. (2025.2.15.)

유세 차, 을사(乙巳)년 정월 열여드레, 대구광역시 시등회 전○○ 회장과 그 회원은 을사년 새해를 맞아, 유서 깊은 팔거산성과 고분군 유적지로 시민의 사랑을 받는 함지산 산기슭을 찾아와 마음을 모아 천지신명께 삼가 고하옵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시등회 회원들은 산자수명한 우리 강산을 흠모하여 그동안 삼십여 년 넘게 꾸준한 산행을 통해 자연을 흠모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회원들과의 정의(情誼)를 소중히 다지고 있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총명 신성한 푸른 뱀의 기운으로 지혜롭게 변화하여 성장 발전한다는 을사년에 간절히 비옵나이다. 세월이 흘러 회원들이 이제 모두 건강을 지키면서 마음을 수양하고, 자연을 거닐며 소요(逍遙)에 심취하고 있나이다. 을사년에도 우리 회원이 평소와 다름없는 마음으로 단합하게 하여 일 년 열두 달 안전하고 강녕하게 산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회원 가족들 또한 화목하고 무병장수하도록 성심으로 소원 하나이다. 김○○ ~ 황○○ 회원이 저마다 소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도록 이름 석 자를 일일이 거명하여 천지신명의 가피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나이다. 이에 우리 회원들이 간소한 술과 음식을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시고 저희 소원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을사(乙巳)년 정원 열여드레, 대구광역시 시등회 회장 전○○ 외 회원 일동 상향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의 한마디 덕분에  (0) 2025.02.28
MBN 2대 현역가왕은 박서진  (0) 2025.02.26
백태호 선생의 정물화 2점  (0) 2025.02.15
사문진 노을  (0) 2025.02.12
성철 스님 사리탑에서  (0) 2025.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