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DAY | 뽄페라다 > 비야프랑까 델 비에르소

2025. 1. 15. 00:37산티아고 순례길

728x90

2019.4.12.(금), 맑음.
27.1km(618.9km) / 7시간 24분




눈을 뜨니 아스또르가에 이어 이곳 산 니콜라스 데 플루에 알베르게에서도 아름다운 성가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니 가스펠이다. 좋아하는 흑인 영가와 리듬이 같다. 아침 음악은 참으로 신선하다. 카미노에서는 음악 듣기가 쉽지 않은데 알베르게에서라도 이런 음악을 제공해 주니 감사하고 행복하다. 라면을 끓여 먹고 길을 나서는 동안 아름다운 화음이 계속 흘렀다.

십 분 만에 뽄페라다 요새로 불리는 템플 기사단의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에 왔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성채는 전투적인 위엄을 자아냈다. 이 성은 템플 기사단이 순례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1178년에 지어졌다. 성벽을 따라 총안과 망루, 맹세의 탑이 있다. 이 성채로 인해 뽄페라다는 탬플 기사단의 도시로 불린다.


뽄페라다의 가장 커다란 유산은 기사단의 성채입니다. 당시 기사들은 세 겹의 성벽에서 세 번의 맹세를 해야 했고, 성벽에 있는 열두 개의 탑은 별자리를 의미했습니다.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성배와 성궤에는 전통에 따라 후세의 기사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템플 기사단의 기도문 속에는 이 두 보물의 위치를 알려주는 비밀스러운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고 전해집니다. 뽄페라다에서는 매년 7월 중순 여름의 첫 번째 보름달이 뜰 때 중세의 템플 기사단을 기리며 밤을 보내는 축제를 벌입니다. 중세식 복장을 한 사람들이 템쁠라리오 광장부터 성채까지 행진하고, 템플 기사들에게 성배와 성궤를 헌납하는 모습을 재현합니다. (발췌: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협회)

템플 기사단 Ordre des Templiers이란? 중세 십자군 전쟁 때 성지 순례자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서방 교회의 기사 수도회이다. 본래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 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로서 '성전 기사단' 또는 '성전 수도회'로도 불린다. 단원들은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흰색 겉옷을 입었으며, 대부분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하였다. 비非전투적 단원들은 금융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여 많은 요새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필리프 4세Philip IV가 왕권 강화를 위해 교황 클레멘스 5세Pope Clement V에게 해산 압력을 넣어 1312년 해산령을 내렸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요약)



기사단 성채에서 카미노 사인은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la Encina으로 이어졌다. 성당 앞에 성채를 건설할 때의 전설을 재현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날이 밝자 벽과 담장이 낙서투성이로 변했다. 그라피티가 문화이자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지만 조금은 극성스러운 면을 느꼈다. 우리나라에서는 형법상 재물손괴죄의 적용을 받는 범죄 행위다. 허가를 받아 낙서하는 뮤랄도 있다지만, 드물 것 같다. 카미노에서 그라피티를 만나면 유심히 살펴봤다. 낙서 속에는 세종대왕이 만든 눈 익은 글자를 더러 발견했다.


카미노 사인을 따라가니 도로와 흙길이 반복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시골 풍경과 비슷한 농촌 마을도 보였다. 마을의 지붕이 모두 새까맸다. 산악 마을인 폰세바돈부터 까만 지붕뿐이다. 주홍색 지붕은 왜 없어졌을까. 잠깐이지만 궁금증이 일었다.

나야라 알베르게에서 카페콘레체를 마신 후 마을과 마을이 이어진 도로를 걸으면서 우성현이 순례자들의 점프(걷지 않고 차를 타는 것)와 동키 서비스(배낭을 자동차 택배로 보내는 것)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지난 일이 떠올랐다. 우리보다 늦게 시작해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점프였다. 훗날 그들에게 직접 듣기도 했다. 걷는데 시달리고 기운이 빠져 융통성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더러 있었다.


포도주 공장Vinas del Bierzo 전시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량으로 전시된 와인이 화려하여 눈길을 끌었다. 병에 붙은 라벨까지도 마음을 잡아당겼다. 전시물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손상을 입힐까 불안한지 삼십 대 여종업원의 눈초리가 매섭게 우리를 따라다녔다. “시음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1잔에 2.5유로”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5잔을 주문했다. 보르도 용 잔에 레드 와인을 1/3 정도 따라 주었다. 폼을 잡고 향과 맛을 음미했다. 카미노에 와서 포도주를 매일 마시고 있지만, 맛은 잘 모르겠다. 우정의 맛이 와인 맛보다 더 강하게 숙성되었기 때문이리라. 한 잔씩 맛보기를 끝내고 전시된 와인을 구경했다. 종업원의 표정이 별로 탐탁지 않아 보여 그냥 나왔다. 마켓에서는 1.5유로면 한 병을 살 수 있다. 시음 값치고는 적은 돈이 아니건만 친절하지 않은 태도에 한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를 할 줄 모르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검붉은 땅에 포도밭이 바다를 이루었다. 농번기에는 고단함의 바다일 것이고, 수확 철에는 풍요의 바다가 될 것이다. 농부의 땀방울을 먹고 자란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기를 소망한다. 그 포도밭에 안락한 상징인 ‘호텔 목욕탕 침대’ 대형 광고판이 세워져 있다. 일하는 농부라면 하루의 피로를 풀어내는 최적의 휴식처가 아닐까. 갑자기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우리나라 사우나탕이 절실히 그리운 순간이었다.


까까벨로스를 내려가는 언덕 마을에서 노인 한 분을 만났다. 노인은 목줄이 풀린 성견을 데리고 서 있다가 우리를 보고 “올라” 하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답례하니 “꼬레아?” 하며 되물었다. 한국 순례자임을 확인한 그는 따라오라며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아들이 한국에서 담배회사에 다닌다며 엄지를 추어올리고, 자신도 한글을 공부한다고 출입문에 붙여놓은 쪽지를 가리켰다. A4 용지에 한글과 스페인어로 10가지 문장을 만들어 외우는 중이었다. 스마트 폰에서 아들과 손자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고, 사위도 곧 한국으로 갈 계획이라며 자랑했다. 우리나라 국력이 증명되는 듯해 가슴 뿌듯했다.

까까벨로스 도로변 무인 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쉼터 벽의 벽돌 한 장 한 장마다 세계 각국 언어가 깨알같이 적혀있었다. 그중에는 한글도 여러 개 보였다. ○○야! 힘내!, □□야, 파이팅 등 짧은 글이었지만 공감됐다. 한국 순례자들이 썼다.

도로를 따라가니 주택들이 오래된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테라스는 지주목을 받쳤고, 추녀에 주렁주렁 매달린 옥수수는 향수를 불러냈다. 골목 도로에 빵집이 있었다. 쇼윈도에 진열된 바게트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나무 오븐에 빵을 굽는 가게였다. 맛집이었는지 손님 왕래가 잦았다. 우리도 바게트 4개를 샀다. 점심으로 먹었는데 맛이 좋았다. 좀 더 큰 것을 사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포도밭뿐이다. 산골이지만 어디나 도로가 나 있었다. 포도를 수송하려면 도로는 필수겠다. 포도 따는 시기에 순례한다면 최소한 배는 곯지 않겠다는 얕은 생각에 웃음이 났다. 20km가 넘어서자, 체력이 고갈되는지 힘이 든다. 그동안 600km를 넘게 걸었으니 당연하다. 일행들은 씩씩하게 잘도 걷는다. 쉬자는 소리를 포도알처럼 꿀꺽 삼킨다. 오늘 목적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마을은 아직 3km나 남았다. 뒤처지면 안 되니 부지런히 따라붙었다.


마침내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공립 알베르게가 있었으나 3월에 tvN에서 방영한 ‘스페인 하숙’ 촬영지에 가려고 통과했다. 작은 언덕 위에 꺼무스름한 성당, 용서의 문puerta del Perdon을 가지고 있는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과 맞닥트렸다. 이 성당은 13세기에 지어져 성년(7월 25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해, 2021년)에만 열리는 용서의 문으로 유명하다. 용서의 문이 굳게 닫혀있어 눈으로만 봐야 했다. 이 문은 교황 갈리스토 3세가 교서를 통해, 병들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순례를 마치지 못한 순례자들이 이곳 용서의 문을 통과하면 산티아고에 도착한 것과 같다고 인정했다. 이런 연유로 순례자들에게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비슷한 가치를 지닌 곳이라고 높이 산다. 우리는 성당 밖에서 스스로 알 수 없는 죄목에 갇혀 무조건 용서를 비는 예를 올렸다.


오후 두 시 이십 분, tvN ‘스페인 하숙’ 촬영 현장인 산 니꼴라스 엘 레알 수도원Convento San Nicolas el Real에 들어갔다.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출입구인 초록색 미닫이문이 보였다. ‘스페인 하숙’ 방영을 홍보하려고 탤런트 유해진, 차승원, 배정남이 여기서 광고를 찍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김효겸이 먼저와 앉아 있었다. “2시간째 기다리고 있다.”라며 “다른 사람은 기다리다 모두 떠났다.”라고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여행자 입장서Libro De Entrada de Viajeros를 펼쳐보니 2. 21. 40번째 등록자 이후 공백이었다. 그동안 알베르게가 휴업했다. 출입문에 안내문도 없었다. 결국,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김효겸은 육군 27연대를 전역하고, 복학하기 전에 산티아고 순례를 하는 청년으로 카미노에서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마을 끝, 발까르세 강가rio Valcarce의 사설 알베르게 삐에드라에 투숙했다. 조용하고 강물 흘러가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는 숙소였다. 대충 씻고 전망 좋은 부르비아rio Burbia 강가의 바르에서 맥주를 마셨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는 부르비아 강과 발까르세 강 두 개가 흐르고 있었다. 중심지인 마요르 광장까지 마을을 다시 한 바퀴 돌았다. 눈에 들어오는 유적이 많았다. 광장에서 다시 만난 효겸이가 “산 니콜 알베르게가 오후 세 시 삼십 분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들렀다. 관리자인 덩치 큰 여성이 “오늘 늦게 문을 열었다. 9개 침상만 개방한다.”라고 말하며 혼자 바쁜 척했다.


마을마다 쓰레기 분리 수거함이 도로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