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2. 00:07ㆍ산티아고 순례길
2019.3.20.(수), 맑음
한국을 떠나온 지 삼 일째, 마드리드에서 적응 기간으로 하루를 보내고 팜플로나Pamplona를 거쳐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 도착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평원과 구릉지,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을 보고 스페인의 드넓은 대지에 비로소 와 있다는 게 실감 났다. 벨로라도Belorado 부근에서 순례자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보슬비가 내리는데, 걸음걸이에 힘이 빠진 듯 보여 앞으로의 여정이 쉽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모습도 저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마음속 응원을 했다.
팜플로나 터미널에서 네 번째 순례에 나선다는 LA 교민 남성(74세)과 서울에서 혼자 온 전업주부 윤○미 씨를 만났다. 만리타국 스페인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다니! 이야기를 나누며 세계화 시대를 실감했다. 그들로부터 순례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생장피드포르 가는 길은 왕복 2차선이었다. 한 차선으로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졌다가 반복하는 차선이 불규칙했다. 하지만 가로변의 무성한 숲이 두 눈을 푸르게 물들이면서 마음을 편안히 해주었다. 피레네산맥의 고봉은 아직도 흰 눈이 쌓여있었다. 목이 말랐던 터라 하얀 눈을 보니 팥빙수가 절로 떠올랐다. 침을 꿀꺽 삼켰다. 목장 초지 가장자리에 나지막하게 엎드린 마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온종일 버스를 타는 게 고됐지만 아름다운 풍광에 피로감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새벽 6시에 숙소를 나와 오후 4시 반,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했으니 근 10시간 버스를 탔다.
스페인 국경에서 약 8km 떨어진 프랑스 생장피드포르는 니베강Nive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했다. 순례자들에게는 스페인 론세스바예스로 향하기 직전의 중요한 마을이었다. 생장피드포르에 도착하자마자 ‘크레덴시알Credencial(순례자 여권)’부터 발급받으려고 산티아고 순례자협회를 찾아갔다. 크레덴시알은 각국 정부에서 발급해 주는 여권Passport과는 달랐다. 여기서 발급받는 크레덴시알은 자신이 순례자임을 입증하는 증명서 같은 것이다. 아코디언씩 직사각형 리플릿 형태로 되어 있으며 한국 순례자협회에서도 발급받을 수도 있다. 순례자 여권은 카미노를 걸을 때 하루 한두 곳 알베르게, 성당, 박물관, 바르, 레스토랑 등을 방문하여 그곳의 독특한 스탬프를 찍는다.
협회 사무원들은 나이 지긋한 오스삐딸레로hospitalero(주로 순례를 마친 이들의 자원봉사자)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순례를 경험한 분들이라 그런지 후덕해 보였다.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후 소정 서식에 국적, 나이, 직업, 순례 목적 등을 기재하니 순례자 여권을 발급(2유로)해 주었다. 그리고 카미노의 알베르게 목록과 구간별 고도표를 건네주면서,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는 나폴레옹 길Napoleon Route(해발 1430m Cize봉)은 많은 적설량으로 폐쇄됐으니 발까를로스Valcarlos Route(해발 882m, 국도)로 우회하라고 알려주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그림까지 그려가며 알아들었느냐고 “오케이?”를 연발한다. “오케이!”라고 대답하자 환하게 웃으며 카미노 상징인 가리비를 하나씩 가져가라고 했다. 우리는 광주리 속의 많은 가리비 중에서 마음에 드는 하나씩을 골라 각자 배낭에 매달았다. 가격은 기부금제donation이어서 동전을 몇 개 챙겨 내놓았다. 마침내 우리는 순례자가 되었다.
숙소는 55호 알베르게로 지정받았다. 시설은 도미토리dormitory로 여러 사람이 함께 숙박하는 방이었다. 독일 여성이 먼저 와 배낭을 정리하고 있었다. 눈인사만 하고 배낭을 풀어놓고 여유롭게 이국의 마을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가 거기라고 짐작했건만, 막상 다른 나라의 땅을 밟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배꼽시계가 울어댔다. 숙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켓을 겨우 찾았다. 내일 먹을 식품을 간단히 구매하고 등산용품점에 들러 스틱 1쌍씩을 샀다.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작은 레스토랑을 찾아가 낯선 프랑스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모험 같았던 오늘 하루를 풀었다. 내일은 진짜 순례에 나선다. 낯선 땅에서 우리의 시간이 감미롭게 깊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