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환성사

2024. 11. 12. 00:22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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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본 환성사


하양읍 스타벅스 무학점을 지나 한 줄기 후미진 도로를 5km 정도 따라가니 환성사다. 사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언저리 빈터, 파란 하늘이 트였고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울린 맨땅바닥 주차장이 자연 친화적이다. 오른쪽에 일주문이 서 있다. 속(俗)과 성(聖)의 경계가 지척이다.


일주문


일주문이 특이하다. 대부분 둥근 목조기둥 2주를 세운 것이 일반적인데, 네 개의 돌기둥이다. 양 끝의 두 기둥은 사각이고 자세히 보니 가운데 두 개는 팔각이다. 일주문은 세속의 번뇌를 문밖에 내려놓고 오직 일심 하나만 가지고 도량으로 들어오라는 상징적인 문이다. 한 발을 내디디니 청정 법계다. 일개 범부가 번뇌 망상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용연


일주문을 지나 가람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에 작은 연못이 보인다. 환성사 쇠락의 전설을 품은 용연(龍淵)이다. 밤에는 달이 반영돼 아름답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아취를 자아낼 것만 같다. 본래는 큰 연못이었는데 메워져 현대에 새로 팠다. 환성사의 중흥을 기대해 본다. 주위에 놓인 벤치가 노후해 앉고 싶지 않았다. 고인 물도 탁하고 멧돼지가 주변의 흙을 파헤쳐 섬뜩하다.


전각 입구 계단길의 거목 두 그루


가람으로 향하는 돌계단에 키가 큰 나무 두 그루가 벌써 낙엽을 떨어트려 앙상해 보였다. 한 그루는 은행이고 다른 하나는 느티나문 듯하다. 종류가 다른 두 나무는 오누이처럼 가깝게 자랐다. 왜 하필이면 절 입구를 막는 나무를 심었을까. 쇠락의 의미나 교훈이 숨어 있을 듯하나, 나그네는 알 수 없다. 계단이 끝나고 축대 마당 안에 날렵하게 생긴 수월관(水月觀)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층 누각인 수월관
대웅전에서 바라본 수월관


팔작지붕 끝이 살짝 올라간 추녀가 멋스럽다. 팔작지붕은 장식성이 고급스럽다. 그래서 한옥 지붕 중에서 격을 가장 높이 친다. 안내판에 의하면 수월관은 조선 숙종 대인 1700년쯤 지어졌다. 강당으로 사용했고 1층을 통해 대웅전 마당으로 드나들어 절의 입구 역할을 한다. 건물을 지을 때 절 앞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누각에서 보면 달이 연못에 비치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서 수월관이라 작명했다고 한다. 현재의 누각은 복원한 것이고, 메워진 연못도 작으나마 다시 팠다. 이 층 누각에서 연못이 -새로 쌓은 축대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으니 수월관 이름이 무색하다. 그러나 단풍 든 앞산의 풍광이 수월의 운치에 못지않게 다가섰다.


수월관에서 본 대웅전
노주대, 삼층 석탑, 심검당, 대웅전
삼존불과 수미단


환성사는 835년(통일신라 흥덕왕 10) 심지왕사*가 창건했으나, 고려말에 소실됐다. 이후 세 차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의 대웅전은 1897년(고종 34년, 광무 원년)에 지었고 1971년 보물로 지정됐다. 전각이 단아하고 수수하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 삼존불*이 봉안돼 있다. 불단인 수미단은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조각 기법이 우수하다. 경상북도 유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었다. 굳이 촬영 금지하기보다는 사진을 찍어 아름다운 불교 예술이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살짝 든다. 환성사에는 대웅전 외에도 심검당, 수월관, 산령각, 요사 등의 전각이 있다.


대웅전 법당 안 금고


수미단 옆에 놓인 금고(金鼓)는 법당 안에서 범종을 대신해 의식용으로 사용하는 쇠북이다. 나무틀에 매달아 당목으로 쳐서 소리를 낸다. 조선 시대 이후 범종을 갖지 못한 절집은 금고로 의식을 대신한다. 환성사 가까이 무학산(588.5m)이 있어 '무학산 환성사'인 줄 알고 있었는데, 금고의 명문이 '팔공산 환성사'로 돼 있어 이채롭게 느껴졌다.


심검당


수월관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 왼쪽 건물이 심검당이다. 조선 시대부터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 초기 건립된 개심사 심검당과 유사하고, 1375년(우왕 1)에 건립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국보)보다는 백 년쯤 뒤진 여말선초의 건축양식을 보여 건축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관세음보살과 사명대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수수해 보이는 건물이 보기와 달리 학술 가치가 있다니 놀랍다. 들어가 보지 못했다.


명부전


사람이 죽어서 가는 세계를 명부(冥府)라고 하듯이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를 상징하는 전각이다.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이 주불로 있어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염라대왕은 열 명의 지옥 왕 가운데 다섯 번째 왕이다. 문이 굳게 잠겨있어 내부를 보지 못했다.


백구의 이름은 관음, 불러도 빤히 쳐다만 본다.
나가면서 본 일주문 풍경


저물어 가는 깊은 산중의 가람은 고즈넉했다. 스님도 보이지 않고 독경 소리도 들리지 않아 더욱 한적했다. 넓은 마당의 백구(白狗)조차 짐짓 무표정하게 눈만 껌벅이며 산사의 적적함을 깨우지 않는다. 절을 한 바퀴 돌아 주차장에 내려오니 관리인이 애완견을 동반한 젊은이를 입장 사절해 돌려보냈다. 관리인에게 "관음(백구 이름)이도 있는데 왜 입장 사절하나요?"라고 물으니, 관리인이 "그건 우리가 키우는 개"라고 대답한다. 이해가 될 듯 말 듯했다. 일주문을 들어설 때 벗어놓은 번뇌 망상을 다시 집어 들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2024.11.9.)

* 심지왕사: 통일신라 제41대 헌덕왕의 아들로 15세에 출가하여 진표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승려. 동화사를 중심으로 유식 법상(唯識法相)의 가르침을 전했다. 유식은 마음의 본체인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도 없음을 이르는 말. 심지왕사의 아버지인 헌덕왕은 조카인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자였던 그가 출가한 사실은 그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삼존불: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문수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을 둠.

전각 입구에 쌓은 축대와 담.
용연 주변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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