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4. 07:13ㆍ입맛
다섯 시 사십 분, 조금 이른 시간 같았다. 식당에 들어서니 우리가 마수였다. 장삿집에는 재수 좋을 사람이 먼저 들어가야 그날 장사가 잘된다는 데, 중로(中老)가 첫 손님으로 발을 들이니 젊은 주인에게 괜히 미안스러웠다. 그나마 천주교 독실한 신자인 베라노가 먼저 들어가 다행이랄까. 명덕역 물베기* 거리의 <그린쌈밥>은 주택을 개조한 쌈밥 식당이다. 삼겹살과 생오리, 돌솥밥을 취급했다. 담벼락의 담쟁이넝쿨이 인상적이었다.
밥은 먹지 않으니 기본인 생삼겹살에 소주를 놓고 근황을 주고받았다. 고기가 신선하고 단출한 상차림이 소주 마시기에 딱 맞았다. 베라노는 올해 성당의 책을 편찬 중이다. 발간 날짜가 다가오니 고민되는 모양이다. 봉사 정신이 투철해 무난히 맡은 일을 잘 수행하리라 믿으며 권커니 잣거니 술을 마셨다. 한 시간쯤 지나 두 번째 손님으로 수녀님 세 분이 들어왔다. 가까운 좌석이라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들었다. 수녀님 한 분의 축일이어서 식사하러 오신 거였다. 베라노에게 "식사비를 계산해 드리면 어떨까"라고 운을 떼니, 그가 '거룩한 무관심'에 관해 말했다. 그것은 상대의 사생활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뜻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일리 있었다. 술자리를 끝낸 후 베라노는 수녀님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나왔다.
나는 쌈밥을 좋아한다. 집에서 별다른 반찬 없이도 채소와 된장만 있으면 맛있게 식사할 수 있다. 채소의 넓은 잎에 밥을 싸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 것을 福쌈이라고 한다. 복쌈은 눈을 밝게 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한다고 해 命쌈이라고도 한다. 쌈은 채소뿐만 아니라 미역과 다시마 등 해산물로도 쌈이 되니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먹을거리의 하나다. 조선 시대 실학자 유덕공은 상추쌈 시를 지어 '오므린 모양새는 꽃봉오리요/ 주름 잡힌 모양은 피지 않은 연꽃'이라고 했다. 앞으로 쌈을 예쁘게 싸 입은 크게 벌려야겠다. (2024.8.23.)
* 물베기: 과거 도시철도 명덕역 인근이 논밭일 때 영선 못에서 하천으로 흘러내리는 물로 그 일대가 항상 흥건했었다. 땅에 물이 늘 배 있다고 해서 '물베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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