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여행에서

2023. 11. 13. 04:39여행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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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들어 청도 몇 곳을 둘러봤다. 간 곳의 안내판 머리글에 '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 발상지 청도'가 적혀있었다. 상세한 내용을 알아보려고 웹에서 찾아봤다. 그중의 하나, 평해 군수를 역임한 박호 선생이 별세했을 때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평해 사람들이 청도까지 달려와 선정을 베푼 군수의 죽음을 애통하여 보인 모습의 글을 읽고 가슴 뭉클했다. 화랑정신의 세속오계를 전수 한 신라의 두 무장의 투혼과 기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추진을 돌아볼 기회가 된 이번 여행은 진지했다. 청도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있는 전래 설화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1.
만추의 청도를 여행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붉은 홍시였다. 장관이었다. 청도는 감의 고장이다. 가로수도 감일 정도로 가는 곳마다 감나무다. 유명 코미디언 한 분은 홍시를 보고 감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청도의 감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씨 없는 감으로 모양이 동글납작해 '청도 반시(盤柹)'라고 부른다. 매년 친구 농장에서 손자 주려고 직접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었는 데 올해는 만들지 못했다.  

박호(1512∼1579)는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평해 군수를 지냈다. 그때, 사신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친구로부터 중국에서 가져온 감나무의 접수(接穗)를 얻었다. 이를 무 속에 꽂아 고향(청도 이서면)에 가져와 재래종에 접을 붙여 세 그루를 심었는데, 씨가 없는 큰 감이 달려 고향 이름인 새월[新月]을 따서 ‘새월 반시’라 했다. 이 감이 이서면 일대에서 점차 청도 전역으로 퍼져서 오늘날의 ‘청도 반시’가 되었다. 그때 심은 ‘새월 반시’의 시조 나무 한 그루가 청도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청도 감을 다른 지역에 심으면 씨가 생긴다. 청도 반시에 씨가 있으면 바람났다는 소릴 듣는다. 씨가 없는 이유는 지형과 기후 특성, 품종 등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이유라지만, 신기하다.

2.
청도를 화랑정신의 발상지로 일컫는 이유.

신라 진평왕 22년(서기 600년) 원광법사가 운문사의 가슬갑사*에 주석하면서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으로서 갖추어야 할 수신계인 세속오계*를 전수함으로써 화랑의 실천 이념이 되었으며 향후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청도군은 화랑정신의 발상지로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고 위상을 정립하고자 운문면 신원리에 화랑공원 설치, 신화랑 풍류 체험 벨트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삼국 시대 신라에 화랑이 있었듯이 백제, 고구려에도 화랑의 정신과 유사한 그런 무리나 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청도를 새마을운동 발상지로 일컫는 이유.

1969년 8월 초순, 故 박정희 대통령이 경남의 수해 현장을 시찰하려고 전용 열차를 이용해 청도지역을 통과하던 중, 신도마을 주민들이 수해 복구하는 광경을 보고 전용 열차를 멈추게 했다. 그곳에서 마을 전체가 잘 정비된 모습과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의지에 깊은 감명을 받아 새마을운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 1970.4.22, 한해 대책 전국 지방 장관회의에서 전국의 농촌 마을을, 신도마을을 본보기로 하여 잘 가꾸어 볼 것을 지시함으로써 이는 곧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신도마을이 새마을운동 발상지로 주목받게 됐다.

청도군에서는 새마을운동 정신 계승을 위해 2009년 신도1리에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을 조성했다. 볼거리, 배울 거리, 즐길 거리, 체험 거리 등 다양한 콘텐츠를 운영한다. 지금은 새마을운동이 아프리카로 수출한다니 우리나라의 자랑이다. (2023.11.4.)

* 가슬갑사(嘉瑟岬寺) : 대작갑사(大鵲岬寺, 현재 운문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오갑사(五岬寺) 가운데 하나. 오갑사는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서쪽의 소작갑사(小鵲岬寺), 남쪽의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의 소보갑사(所寶岬寺), 동쪽의 가슬갑사로 구성되었다.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툴 때 후백제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은 오갑사가 전란에 휩싸여 파괴되었다.

*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 두 사람은 군인으로 어려서부터 우정이 두터웠다. 원광법사(圓光法師)를 찾아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고, 계율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그 뒤 602년(진평왕 24) 8월 백제군이 아막성(남원 운봉)을 공격할 때 출전,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다가 격전 중에 입은 상처로 두 사람이 죽었다. 이에 진평왕이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 들판에서 맞이하여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귀산은 나마(奈麻), 추항은 대사(大舍) 벼슬에 추증(追贈)했다.

* 세속오계 :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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